이재명 대통령이 제주 4·3사건 당시 진압 작전을 이끈 고(故)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국가보훈부에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앞서 10월에는 여순·순천(여순)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 조치”를 약속했는데, 이해 당사자들 간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역사적 사안에 대해 연이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15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전날 박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경위를 살펴보고 이를 취소할 수 있는지 검토하라고 권오을 보훈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보훈부는 “관련 법률과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보훈부 서울보훈지청은 지난 10월 20일 유족의 신청에 따라 박 대령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박 대령 측은 11월 4일자 이 대통령 명의로 된 번호 '제25-16-00470'의 국가 유공자 증서를 수령했다.〈
중앙일보 12월 10일자 18면〉
대통령이 직접 국가유공자 지정 및 취소에 관여하고 나선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정부 안팎에서는 나온다. 이와 관련, 이 대통령은 여수·순천(여순) 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10월 19일 여순 사건 77주기를 맞아 페이스북에 “1948년 10월 19일,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 2000여 명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고, 부당한 명령에 맞선 결과는 참혹했다”고 올렸다. 또 여순 사건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2021년 제정된 '여순사건 특별법'에 따라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여순 사건 등 민감한 역사전쟁 구도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모양새다.
박 대령은 제주 4·3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5월 제주 11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40여일 만인 6월 18일 부대 안 막사에서 남로당 세포로 활동하던 부하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4·3 사건 희생자 유가족과 단체들은 그가 진압 책임자였다는 점에서 “학살의 주범”이란 입장이다. 반면 박 대령 측과 일부 단체는 “박 대령은 양민 학살에 관여하지도 않았는데 주범으로 몰렸다”고 반박한다.
정부 차원의 4·3 사건 진상 조사인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2003년 12월)’에도 양쪽 시각이 모두 담겼다. “박 대령은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 했던 것”이란 소대장의 증언과 “박 대령이 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했다”는 진술이다. 보고서는 제주 4·3사건 특별법에 따라 국무총리실 산하 위원회가 작성했다.
다만 정부 보고서 역시 4·3사건 때 민간인 학살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시기는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이후로 보고 있다. 박 대령은 5개월 전에 이미 사망한 셈이다. 이런 내용이 영화 ‘건국전쟁 2’에서 재조명 되며 박 대령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진영 간 갈등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도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제주 4·3 희생자는 국가 폭력의 희생자며 당시 진압에 동원됐던 군인·경찰은 혼란한 시대의 피해자”라고 올렸다. 희생된 주민 뿐 아니라 진압 작전에 동원된 박 대령 등 군·경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취지였다. 다만 권 장관은 몇 시간 뒤 군·경과 관련한 “피해자” 표현을 “시대의 아픔”이라고 수정했다.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는 특정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국가유공자법 제9조 3항은 “국가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이 거짓이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등록 결정을 받았거나, 국가유공자 등록 요건에 “중대한 흠결”이 밝혀진 경우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취소하도록 하고 있다. 박 대령의 유공자 등록 자격은 1950년 12월 정부가 수여한 을지무공훈장에 따라 자동으로 부여된 것이라 거짓이나 절차적 흠결로 볼 여지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번 지시는 무공수훈자라 심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사회적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수여한 무공훈장을 취소한다면 유공자 지정 취소도 가능할 수 있다. 다만 이 역시 상훈법 제8조는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지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 실형이 확정된 경우 등 취소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국방부는 “관련법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가능한 조치 사항을 판단하겠다”라고 설명했다.
박 대령의 양손자인 박철균 동국대 교수(육군 예비역 준장)는 중앙일보와 만나 “4.3 사건에 대한 모든 확증 편향이나 경로 의존성을 떠나 사실에 근거해서 냉정하고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