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에서 또 한 명의 우파 대통령이 탄생했다. ‘핑크 타이드(좌파 연쇄 집권)’의 중심이었던 칠레에서 4년 만에 강경 우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최근 중남미를 휩쓸고 있는 ‘블루 타이드(우파 연쇄 집권)’ 흐름이 더욱 뚜렷해졌다.
14일(현지시간) 칠레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9) 공화당 후보가 58.2%의 득표율로 히아네트 하라(51) 공산당 후보(41.8%)를 꺾고 당선됐다. 카스트는 지난달 16일 1차 선거에선 집권 여당의 지지를 받은 하라에 밀려 2위로 결선에 올랐지만, 보수 지지층 결집에 성공하며 역전승을 거뒀다. 이로써 칠레는 중도우파 성향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 대통령 이후 4년 만에 우파로 정권이 바뀌게 됐다.
카스트는 변호사 출신으로 하원에서 내리 4선을 지낸 30년 차 정치인이다. 반(反)이민, 공권력 강화 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치 스타일이 비슷해 ‘칠레의 트럼프’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 같은 강경 이미지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란 평가를 받으며 앞선 두 차례 대선에선 고배를 마셨다. 그의 집안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이민자 출신인 카스트의 아버지는 나치 당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형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형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카스트도 피노체트 정권을 옹호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2021년 대선에서 30대 신예 가브리엘 보리치(39) 대통령에게 패했다.
그렇게 주류 보수 진영에서 밀려나는 듯했던 그였지만, 최근 치안 문제가 대두하며 좌파 정권의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칠레는 지난 몇 년간 강력 범죄가 급증하며 ‘남미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라는 자부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권자들은 유례없는 범죄의 원인을 이민자에서 찾았다. 코로나19 이후 베네수엘라 출신 갱단이 유입되면서 과거에 보지 못한 차량 강도, 납치, 총격 사건 등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카스트는 미 이민세관단속국(ICE)과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 불법 이민자 단속에 나서는 정책을 제안했다. 페루, 볼리비아와 맞대고 있는 북부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겠다는 공약은 트럼프의 멕시코 국경 장벽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공화당이 지난달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기에 공약 이행을 위해선 다른 당의 협조가 필요하다.
최근 중남미에선 잇따라 우파 정권이 들어서며 블루타이드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2019년 아르헨티나를 시작으로 2020년대 초 볼리비아·온두라스·페루·칠레·콜롬비아 등에 잇따라 핑크타이드가 나타났지만, 좌파 정부의 치안과 경제 문제에서 실망한 중남미 유권자들이 최근 선거에서 잇따라 우파 손을 들어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에콰도르의 다니엘 노보아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10월에는 볼리비아 대선에서 중도 우파 성향의 로드리고 파스(58)가 당선되며 20년간 지속했던 사회주의 정권이 막을 내렸다.
트럼프의 재집권도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이민 강경책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하나의 동맹을 이루게 된 것이다. 트럼프도 남미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특정 후보를 콕 집어 언급하면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날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카스트의 리더십 아래 칠레가 공공 안전 강화, 불법 이민 종식, 양국 상업 관계 재활성화 등 공동의 우선 과제를 증진할 것”이라며 환영 입장을 냈다.
지난달 30일 대선에서 블루타이드에 합류한 온두라스는 선거 개입 논란을 겪고 있다. 트럼프가 공개 지지했던 후보 나스리 아스푸라(67)가 근소한 차로 당선되자 재검표를 하기로 했다. 내년엔 코스타리카, 페루, 콜롬비아, 브라질이 대선을 앞두고 있다.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브라질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선 중도우파 후보들이 약진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