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통일부, 외교부 패싱 선언 "대북정책, 미국과 직거래 하겠다"

중앙일보

2025.12.15 01:48 2025.12.15 04:34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한·미 외교당국이 정례적인 대북 정책 조율 협의에 착수하기로 한 데 대해 통일부가 불참 입장을 밝히며 필요시 미국과 직접 협의하겠다고 사실상 ‘외교부 패싱’을 선언했다. 역대 진보정부 통일부 장관들은 “외교부에 대북 정책을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잠재해 있던 이른바 ‘자주파 대 동맹파’ 간 대결 구도에 불이 붙는 양상이다.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재명 정부 통일외교안보 정책:평가와 전망'을 주제로 남북관계 원로 특별좌담이 열렸다.  왼쪽부터 김연철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정현백 전 여가부장관,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뉴스1.
통일부는 15일 “동맹국으로서 필요시 국방 정책은 국방부가, 외교정책은 외교부가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남북대화, 교류협력 등 대북 정책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필요시 통일부가 별도로 미측과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협의에 대해서도 “(정상회담 결과물인)공동설명자료(조인트 팩트 시트) 후속협의에 대한 내용으로 알고 있으며, 한·미 간 외교현안 협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통일부는 불참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케빈 김 주한 미국 대사대리는 16일 대북 정책 조율 협의를 처음 진행한다. 앞서 외교부는 지난 12일 이번 협의에 대해 “공동설명자료에서 양 정상은 대북 정책을 긴밀히 공조하기로 합의했다. 후속조치 논의를 위해 여러 협의를 진행 중이며, 북한 관련 협의도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는데, 통일부가 이를 반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 정동영 장관은 지난 10일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도 “한반도 정책, 남북관계는 주권의 영역이고, 동맹국과 협의의 주체는 통일부"라며 한·미 외교당국 간 대북정책 논의에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임동원·정세현·이재정·조명균·김연철·이인영 전 통일부 장관은 이날 오전 “과거 남북관계 역사에서 개성공단을 만들 때나 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 외교부는 미국 정부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고 보수적이었다”며 “전문성이 없고,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다”고 밝혔다. “대북정책은 통일부가 주무부처”라며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대북 정책을 외교부가 주도하는 것은 헌법과 정부 조직법의 원칙에 반한다”고도 강조했다.

작고한 고(故) 홍순영 전 장관 및 박재규·강인덕 전 장관과 현직 국무위원인 이종석 국정원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제외하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의 통일부 장관 전원이 이번 입장문에 이름을 올렸다. 전직이라고 해도 다른 부처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며 정책 운용의 자격이 없다고 직격하는 건 이례적이다.

이들은 이번 협의는 “제2의 워킹그룹”이라며 우려했다. “한·미는 대북 정책에 관해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워킹그룹 방식으로 이를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워킹그룹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인 협의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제재의 문턱을 높이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11월 출범한 한·미 워킹그룹은 양국의 외교부와 국무부를 중심으로 관련 부처가 참여한 협의체로, 비핵화와 대북 제재 문제 등을 수시로 조율하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여권과 진보 진영에서는 워킹그룹이 제재를 엄격하게 적용해 사실상 남북 간 교류협력을 심의하는 기구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북한까지 강하게 반발하면서 2021년 워킹그룹이라는 이름의 협의는 중단됐다.

2019년 5월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이도훈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대화하는 모습. 뉴스1.

하지만 워킹그룹은 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 협력을 지원하고 한·미 간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순기능이 상당했다는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실제 당시 워킹그룹을 통해 제재 면제가 이뤄진 남북 협력 사업만 10여건에 이른다고 한다. 사업이 이행되지 않은 건 북한의 거부 때문일 뿐 워킹그룹이 막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미 외교당국을 중심으로 대북 정책 조율에 나서기로 한 게 동맹을 중시하는 외교부 중심의 동맹파와 주도적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통일부 중심의 자주파 간 갈등이 다시 표면화하는 계기가 된 것도 이런 배경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남북관계발전위원회 민간위원 간담회에 참석하는 모습. 뉴스1.
다만 미국이 여전히 제재 유지를 대북 협상력 제고 수단으로 여기는 가운데 이는 자칫 한국이 제재와 무관하게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겠다는 뜻으로 읽힐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 이는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 간 선순환 형성을 전제로 한 이재명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론과도 결이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실제 전직 장관들의 입장문에는 미 정부 당국자들과 김 대사대리를 직접 겨냥하는 듯한 내용도 포함됐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트럼프 대통령과 미 정부 실무 부처의 의견 차이가 분명한 상황에서 미국 실무자들과의 대북정책 협의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기보다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크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미국 실무대표의 생각을 보면 그가 참여하는 한·미 정책 협의는 북·미 정상회담의 환경 조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대목이다.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미 의원연맹 창립기념 제1회 한·미 외교포럼에서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 대리가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 실무대표는 김 대사대리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사대리는 지난달 정동영 장관을 만나 대북 제재 유지 필요성 등을 강조했는데, 이를 지적한 셈이다.

이와 관련, 전직 통일부 장관이 집단으로 동맹국의 현직 외교사절 대표를 문제삼는 듯한 구도 자체가 외교적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 장관을 만나 정례적 만남을 통한 대북 정책 조율 필요성을 제기한 것 자체가 김 대사대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북 정책 조율 협의를 놓고 통일부와 외교부 간 갈등을 겪는 모양새라는 지적이 나오자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통일부와 외교부 간 의견이 조금 달라도 아직 갈등이라고 말하긴 어렵다"며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인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주.정영교([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