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외교 당국이 정례적인 대북 정책 조율 협의에 착수하기로 한 데 대해 통일부가 불참 입장을 밝히며 필요시 미국과 직접 협의하겠다고 사실상 ‘외교부 패싱’을 선언했다. 역대 진보 정부 통일부 장관들은 “외교부에 대북 정책을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잠재해 있던 이른바 ‘자주파 대 동맹파’ 간 대결 구도에 불이 붙는 양상이다.
통일부는 15일 “동맹국으로서 필요시 국방정책은 국방부가, 외교정책은 외교부가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남북대화, 교류협력 등 대북 정책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필요시 통일부가 별도로 미측과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협의에 대해서도 “(정상회담 결과물인) 공동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 후속 협의에 대한 내용으로 알고 있으며, 한·미 간 외교현안 협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통일부는 불참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케빈 김 주한 미국대사대리는 16일 대북 정책 조율 협의를 처음 진행한다. 앞서 외교부는 지난 12일 이번 협의에 대해 “공동설명자료에서 양 정상은 대북 정책을 긴밀히 공조하기로 합의했다. 후속 조치 논의를 위해 여러 협의를 진행 중이며, 북한 관련 협의도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는데, 통일부가 이를 반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서 이날 오전 임동원·정세현·이재정·조명균·김연철·이인영 전 통일부 장관은 입장문을 통해 “전문성이 없고,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 정책을 맡길 수 없다”며 “대북 정책은 통일부가 주무부처”라고 밝혔다. 전직이라고 해도 다른 부처의 정책 운용 자격을 운운하며 비판하는 건 이례적이다.
이들은 이번 협의를 “제2의 워킹그룹”이라며 우려했다. “과거 워킹그룹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인 협의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제재의 문턱을 높이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11월~2021년 6월 활동한 한·미 워킹그룹은 양국 외교부와 국무부를 중심으로 관련 부처가 참여한 협의체로, 비핵화와 대북 제재 문제 등을 수시로 조율하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여권과 진보 진영에서는 워킹그룹이 남북 간 교류협력 심의 기구로 변질됐다고 비판했지만, 한·미 간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순기능을 했다는 반론도 상당했다.
한·미 외교 당국을 중심으로 대북 정책 조율에 나서기로 한 게, 동맹을 중시하는 외교부 중심의 동맹파와 주도적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통일부 중심의 자주파 간 갈등이 다시 표면화하는 계기가 된 것도 이런 배경이다.
다만 미국이 여전히 제재 유지를 대북 협상력 제고 수단으로 여기는 가운데 이는 자칫 한국이 제재와 무관하게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겠다는 뜻으로 읽힐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역할론과도 결이 다른 주장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통일부와 외교부 간 의견이 조금 달라도 아직 갈등이라고 말하긴 어렵다”며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