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방침을 사실상 철회하기로 했다. 중국과 경쟁 중인 유럽 자동차 업계의 반발에 한발 물러난 것인데, 오히려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과의 격차가 벌어질 거란 우려도 나온다.
1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 집행위원회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내연기관 차량 생산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16일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EU는 2035년부터 신차의 탄소 배출량을 100%로 감축하는 목표를 법제화했는데, 이대로면 27개 회원국에서 하이브리드를 포함한 내연기관 차량 판매가 전면 금지되고 전기차 판매될 예정이었다.
FT에 따르면 개정안은 친환경 철강을 사용하는 등의 조건으로 2021년 탄소 배출량의 10% 수준까지 생산을 허용할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2035년 금지될 예정이던 전기차 내 주행거리 연장용 소형 내연기관 엔진인 ‘레인지 익스텐더’를 허용할 가능성도 있다.
로이터통신은 EU 관계자를 인용해 금지 조치를 아예 5년 뒤로 미루거나 무기한 연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다만 개정안은 EU 회원국과 유럽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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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완성차 업계 반발에 후퇴
내연기관차 금지는 유럽의 기후 대응 노력을 상징하는 정책이었지만, 자동차 업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라며 규제 완화를 촉구해왔다. 독일, 이탈리아 등 완성차 강국 정부도 EU의 금지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12일 “현실은 2035년, 2040년, 2050년에도 전 세계엔 여전히 수백만 대의 내연기관 차량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차와 충전 인프라 보급이 예상보다 더디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엔 중국의 저가형 차량 경쟁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깔렸다. 꾸준히 성장하는 유럽 전기차 시장을 장악한 건 미국의 테슬라와 중국 업체들이다. 특히 중국 전기차는 유럽 전기차의 반값에 불과한 가격을 내세워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지난 9월 유럽에서 기아 등 한국 업체를 제치고 사상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중국산 자동차를 겨냥했던 관세도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EU는 지난해 10월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5.3%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는데, 중국 업체들은 유럽에 전기차 대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판매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이를 우회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내연기관에서 강점을 보이는 유럽 업체에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독일 폭스바겐은 유럽 수요 약세 등으로 인한 현금 흐름 압박으로 16일 창사 88년 만에 독일 내 공장을 폐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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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투자 늦추면 중국에 더 밀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중국과의 격차를 키울 것이란 우려도 만만치 않다. 전기차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어 가뜩이나 부족한 시장 경쟁력이 더 낮아질 수 있다는 걱정이다. 벨기에 소재 싱크탱크 브뤼겔의 시모네 탈랴피에트라 선임연구원은 “금지 조치를 철회는 유럽의 큰 실수”라며 “전기화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인 만큼 업체에 도움이 되지 않고 기후 리더란 유럽의 명성마저 훼손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마이클 로셸러 폴스타 최고경영자(CEO)는 “기술도, 충전 인프라도, 소비자들도 준비됐다”고 반박했다. 폴스타는 중국 지리자동차가 스웨덴 볼보를 인수하면서 합작한 브랜드다.
이에 일부 회원국은 내연기관 차량 금지조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지난 10월 공동 성명을 내고 “(EU의 조치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며 “유럽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전기차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신 유럽 자동차 산업의 부담을 덜기 위해 유럽산 자재를 사용한 자동차에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국은 EU와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2035년부터 모든 신차를 전기차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영국 정부는 2030년부터 디젤 및 휘발유 차량 생산을 멈추고 2035년부터는 하이브리드 차량 생산도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영국자동차공업협회(SMMT)는 “유럽은 영국의 최대 자동차 수출 시장이자 수입 시장이기도 하다”며 “EU의 규제 완화는 영국이 자체 규제를 재검토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