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달러 대비 원화값 급락을 두고 “물가와 양극화 측면에서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이 총재는 17일 서울 중구 한은 본부에서 열린 물가설명회에서 “전통적인 금융 위기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다른 면에서는 위기이고 걱정이 심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값은 장중 한때 1482.3원까지 떨어졌다(환율은 상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인상 여파로 원화값이 주저앉던 지난 4월 9일(1484.1원, 종가 기준) 이후 약 8개월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 총재는 “환율이 오르면(원화값 하락) 내부적으로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이 극렬하게 나뉜다”며 “‘K-성장’으로 불리는 반도체ㆍ조선 등 수출업체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반면, 건설ㆍ내수ㆍ자영업 부문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고 설명했다. 원화값 하락이 그 격차를 크게 벌려 "사회적 화합이 어려운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가도 부담이다. 한은은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1%로 제시했다. 환율이 현재 1470원 안팎에서 유지될 경우, 물가 상승률은 약 0.2%포인트 더해져 2.3%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평균적으로 원화가치가 10% 하락하면 물가가 0.3%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다만 실제 파급력은 기업이 가격에 반영하느냐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외환시장 대응과 관련해선 ‘변동성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현 상황에서는 ‘환율 레벨(수준)’도 보겠다는 점을 시사했다. 이 총재는 “미국 달러 흐름이 비교적 안정된 상황에서도 우리만 절하 국면이 이어지는 데에는 내부 요인이 크다”며 “불필요하게 환율이 올라가는 부분이 있다면 변동성뿐 아니라 레벨 차원에서도 조율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 기획재정부ㆍ보건복지부ㆍ한은ㆍ국민연금은 4자 협의체를 구성해 국민연금 ‘뉴 프레임워크’를 준비하고 있다. 이 총재는 “국민연금의 환헤지(사전에 정한 가격으로 달러를 팔기로 해 변동의 위험을 줄임)에 대한 개시와 중단 시점 등 의사결정이 시장에 너무 투명하게 알려져 있어 (환율이) 박스권을 형성하기 쉽다”며 “좀 불투명하게 할 필요가 있고, 어제 국민연금 회의에서도 그런 부분에 큰 진전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국민연금은 이제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해외 투자 시 국내 주식시장과 고용에 미치는 파급효과까지 고려하며 자산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의 해외 투자가 원화값을 끌어내린다는 시각엔 “환율을 특정 집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ㆍ미 성장률과 금리 격차, 주식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같은 구조적 요인이 장기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단기 수급 요인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매년 200억 달러의 대미 투자가 환율 부담을 키운다는 지적엔 “과도한 우려”라고 선을 그었다. 이 총재는 “양해각서(MOU)상 투자 집행은 외환시장에 영향이 없을 때, 한은이 외환보유고의 이자·배당수익 등으로 자금 공급을 하도록 돼 있다”며 “한은의 책무로서 외환시장의 위협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후 이 총재의 발언을 계기로 1480선이 뚫렸던 달러당 원화가치는 다소 진정돼, 1479.8원에 주간 거래를 마쳤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이날 달러화가 광범위하게 상승하면서 원화가 이 흐름에 편승했는데, 유난히 과도하게 반응했다”고 짚었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1%대 신호가 나오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영향으로 원달러 환율도 1500원선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며 "내년 1분기까지는 환율이 1500원을 수시로 넘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