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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필향만리’] 四體不勤 五穀不分 熟爲夫子(사체불근 오곡불분 숙위부자)

중앙일보

2025.12.17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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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공자의 일행에서 잠시 뒤처진 제자 자로가 어떤 노인에게 “혹 우리 선생님을 못 보셨나요?”하고 묻자, 노인은 “힘써 노동을 하지도 않고 오곡도 분간할 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스승이란 말이요?”라고 반문하며 공자를 쓸모라곤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내 자로를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대접하고 잠자리를 챙겨주며 자식들을 불러 인사까지 시켰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내심 공자 일행을 깊이 존경한 은자였던 것이다. 여기서 ‘사체불근, 오곡불분(四體不勤 五穀不分)’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이론만 내세울 뿐, 실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선비를 비꼴 때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四體: 온 몸, 勤: 부지런할 근, 穀: 곡식 곡, 熟: 누구 숙.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하지도 않고 오곡도 분간할 줄 모르는데 누가 스승이란 말이오? 28x72㎝.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일할 힘과 실용적 실천 역량도 풍부하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해서 선비 즉 인문학자를 놀고먹으면서 공리공담이나 일삼는 존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들 즉 소크라테스·싯다르타·공자·예수 등과 같은 인문학자가 남긴 공리공담처럼 들리는 말의 힘으로 인류는 지금까지 버텨왔다. 말이 곧 빛이고 생명이다. 아무리 위대한 자연과학이나 공학도 인문학의 바탕이 없이는 사상누각이다. 공자를 조롱하는 척 존경한 은자의 속마음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힘이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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