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는 『국가안보전략서』와 『국방전략서』 등 국가의 전략적 방향성을 제시할 문서 발간을 앞두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글에서는 ‘한국이 어떤 국제질서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뤘다. 이번 글은 ‘그 질서를 누구와 연대하여 이룰 것인가’를 다룬다. 이 질문은 한국이 어떤 다자주의를 추구할지, 또 이를 위해 누구와의 협력에 응해야 할지로 구체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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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다자주의’인가?
2025년 9월,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 데뷔 무대인 제8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다자주의적 협력’을 이어 나갈 때, 우리 모두 평화와 번영의 밝은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다자주의는 어떤 다자주의인가?
역사상 가장 큰 다자 포럼이라 할 수 있는 유엔의
홈페이지에서는 다자주의를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목표를 지닌 여러 국가들이 함께 일하는 방식(international politics and diplomacy, where many countries with different views and goals work together)”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해당 방식은 3C, 협력(Cooperation)하고, 타협(Compromise)하며, 노력을 조율(Coordination)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자주의는 늘 불완전했다. 국가의 힘이나 규모와 관계없이 최대한 많은 국가들을 포함해 협력과 타협 및 조율을 이뤄야 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다자무대는 종종 강대국 정치에 휘둘리거나, 서로 다른 국익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여 꼭 필요한 의사결정을 못하게 되기도 했다.
미·중 전략경쟁과 트럼프 행정부 출범은 다자주의의 미래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에 이어 2기에서도 여러 다자협의체에서 탈퇴하며 다자주의와 결별하고 있다. 다자기구가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미국의 국익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이 다자주의의 리더십 자리를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10월, 경주에 왔지만 APEC 정상회의 전에 떠나버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뒤로 한 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정상들에게 “진정한 다자주의를 이행하자”고 연설했다. 마치 그간 미국이 주도하고 추구하던 다자주의는 ‘진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다자주의는 개념적으로 중국이 지향하는 다극화와 양립하지 않는다. 다자주의는 국제기구와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떠받들지만, 다극화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극(국가) 간의 거래와 합의에 따라 질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진핑이 주장하는 다자주의가, 이전의 다자주의보다 더 ‘진정한’ 다자주의일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이처럼 동맹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다자주의를 버리겠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다자주의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면, 그것은 다자주의가 옳은 길이라고 믿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자주의에 대한 한국의 생각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다자주의는 무엇인지, 중국이 말하는 진정한 다자주의와 같은 것인지, 한국은 다자주의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한 답을 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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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협력,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다자주의’가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한국이 속한 지역의 다자협력에 대한 방향을 생각해보며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다. 강대국 경쟁으로 세계가 분열하면서, 더 작은 다자협력의 필요성이 크게 강화했다. 가치와 이해를 공유하는 소수의 국가가 단·중기적으로 협력을 추진해 더 큰 다자협력의 기능적 공백을 메우고, 이러한 협력을 쌓고 참여국을 늘리며 다자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특정 다자협력체나 국가들이 한국을 인도-태평양의 핵심국가로 보고 협력하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이재명 정부는 일부의 초대에 아직 응하지 못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유럽과 인도-태평양이 연계된 전략 공간이라는 인식 하에서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이른바 IP4(Indo-Pacific 4)를 나토 정상회의에 초청해왔다. 여러 사정으로, 이재명 대통령은 아쉽게도 올해 6월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또한 2025년 11월, G20 회의 계기에 열린 한국·인도 정상회담에서, 인도의 나헨드라 모디 총리는 조선 등 미래지향적인 분야에서 ‘소다자 협력’을 추진하자고 한국에 제안했다. 같은 달 제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일본·필리핀을 전략적 삼각형이라고 칭하며, 이들과 미국의 군사협력을 제안했다.
이 같은 초대에 응하려면, 한국은 무엇을 위해 다른 국가와의 어떤 협력이 필요한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국가들을 하나로 묶어 협력할지, 나눠 협력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나눌지, 그때의 이유와 목표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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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무엇을 위해 연대를 원하는가에 집중해야
이 글은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답은 ‘누구’를 버리고 ‘한국’ 스스로를 대면하는 것이다.
다자주의든, 그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다자협력이든, 누가 제안했는지보다 한국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주도적으로 생각해 방향을 잡고, 협력 여부와 방법을 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어떤 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서고자 하는지에 대한 자기규정이 선행되면,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는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곧 발간될 대한민국의 전략서가 그 답을 주는 역할을 무게 있게 감당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