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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 성인이 초등생 옷 입은 격…지금 '헌법적 순간'이 왔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60>]

중앙일보

2025.12.17 12:00 2025.12.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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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마지막 트리거는 '개헌'…신 공동체 계약서 만들자

중앙일보가 창간 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역사의 60가지 결정적 전기(critical trigger)를 독자들과 함께 반추해 왔다. 첫 회 한국의 민주화를 이뤄낸 ‘87년 넥타이 부대’(중앙일보 7월 1일자)를 시작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의 시대 전환이나 변화의 분수령이 됐던 사건들의 맥락,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미래에의 교훈 등을 성찰해 보았다. 이 모든 대한민국의 성취와 교훈을 토대로 새로운 미래 60년의 대한민국, 그리고 소중한 우리 후대들을 보다 번영·행복하게 해 줄 으뜸 과제인 ‘헌법 개정’을 마지막 60번째 트리거로 택했다. 개도국에서 중진국으로 들어가던 38년 전의 우리 ‘87년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 성취’라는 민주화 초기의 임무를 달성했다. 하지만 선진국 진입의 길목에 선 나라와 국민의 나침반으로는 이미 수명을 다한 지 한참이다. 향후 60년의 미래 비전을 명확히 제시해 줄 새로운 ‘공동체의 계약서’, 바로 개헌(改憲)이야말로 지금 가장 절실한 대한민국 도약의 트리거가 돼야 한다.



대한민국 '트리거 60' 〈60〉 헌법과 시대정신

(87년 개헌-6·29 선언) 1987년 6월 29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받아들이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중앙포토]
아마도 ‘전문, 본문 130조, 부칙 6조’, 1만4400자 안팎의 우리 헌법을 다 읽어본 국민은 거의 없을 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1조 정도가 우리가 떠올리는 헌법이다. 공기처럼 우리 의식 밖에 존재하다 탄핵, 촛불 시위 같은 나라의 대혼란 때면 ‘키다리 아저씨’처럼 심판을 내려 주려고 모습을 드러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왜 지금 개헌이 필요할까. 모든 제도는 태어날 때부터 개혁의 대상이다. 우리 헌법의 1987년 개정 과정을 되돌려보면 개헌의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3658달러, 세계 평균을 처음 넘어선 수준이었다. 수출은 471억 달러, 세계 13위권이었다. 38년 뒤인 지금 1인당 GDP는 추산 3만5962달러(세계 37위권)로 10배 넘게 커졌다. 수출액은 15배 폭증한 7000억 달러로 세계 5위권을 넘본다. 상전벽해지만 경제에 관한 우리 헌법 조항은 130조 중 9개에 불과하다. 불변의 원칙이어야 할 ‘시장경제’ 역시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한다’는 한마디만 찾을 수 있다. 나머지 모두도 추상적 선언에 그친다. 갈수록 논쟁적 빅 이슈인 독과점, 불공정 거래를 조정해 줄 ‘경제민주화’ 조항 역시 단 한 줄이다. ‘경제 주체 간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한 줄로 지금의 복잡다기한 거래들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을까. 38세 성인은 여전히 초등생 옷에 몸을 맞춰야 하는 신세다.

지방자치 30년, 헌법 규정은 달랑 2개
정치적으론 커진 몸이 더욱 힘든 옷이다. ‘체육관 선거’ 대신 ‘내 손으로 대통령을’이란 당시의 열망은 역으로 다른 모든 미래에의 숙의(熟議)를 건너뛰게 했다. 여야 ‘8인 회담’의 첫 회의 뒤 두 달 열흘 조금 지난 87년 10월 12일 지금 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핵심들의 얘기가 이랬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골자인 대통령 직선제에 이미 합의가 있었으니. 김영삼·김대중씨에게 보고해 승인만 받으면 일사천리였다”(이용희 전 의원). 김영삼 총재 역시 “직선제 합의로 90%가 타결됐고, 대선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 사소한 문제엔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했었다. 속전속결에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끼어들 시공간이란 없었다. “87년 개헌은 한마디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3인이 만든 것”(강원택 서울대 교수)이다. ‘나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3인의 들뜸의 산물이었다.

지금 헌법은 그렇게 ‘사소한 문제’들을 빠뜨린 걸까. 우선 후대가 지금껏 고통을 겪던 으뜸 원인인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돌아가며 ‘제왕’을 즐길 꿈에 부푼 김영삼·김대중·노태우 3인에게 그런 ‘정치적 신중함(prudence)’이 자리 잡을 여백은 없었다. 여야 정당 간, 행정부와 국회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수평적 책임성, 국정 안정 같은 미래가 우리 헌법엔 보이지 않던 까닭이다.

87년 개헌 국민투표에 참여한 최소 연령인 67년 10월 29일 이후 출생자는 지금 인구의 70%다. 개헌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대와 인구의 나라다. 70%가 서명조차 하지 않은 공동 계약서란 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지방자치 30년이 지났지만 헌법의 지방자치 규정은 130개 중 달랑 2개다. 그나마 ‘지자체가 자치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 ‘지자체에 의회를 둔다’뿐이다. 독일은 헌법의 44.2%가 연방 및 지방 자치권 관련 내용이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조직은 분권화된다”며 국가 운영 원리로 지방분권(decentralisation)을 헌법에 명시했다. 국민의 82%인 4180만 명이 서울 밖에 사는 이 나라의 계약서엔 그러나 ‘지방’이 없다.

시대의 이슈인 복지를 위한 책무는 어떤가.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지닌다’(35조)라는 단 한 줄이다. ‘노력’이란 단어는 매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그때의 ‘사소한 문제’, 즉 경제민주화, 지방자치, 복지 등은 이젠 가장 중요한 우리 삶의 골간이다. 그러나 계약서에 그 정의조차 없으니 정부의 권한·책임 역시 모호해 이 중요한 문제들은 늘 정쟁의 늪에서만 허우적거려 왔다.

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 원본은 6·25전쟁으로 분실돼 관보 등 관계 서류를 참고해 63년에 사본을 만들었다. [중앙포토]
헌법 재건축의 방향은 명확하다. 권력의 분산으로 민주주의를 성숙시킬 ‘민주성’이 첫째다. 둘째는 적대 정치, 세대·성별 갈등을 완화해 줄 ‘평화성’이다. 반면에 국정 성과를 극대화할 ‘효율성’이 셋째다. 모든 지역, 국민에게 균등한 발전, 복지 혜택이 돌아갈 ‘보편성’이 넷째겠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변화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해 나라를 순방향으로 맞춰 줄 ‘미래성’을 지녀야 한다.

승자 독식 제왕 대통령을 해소할 ‘민주성’을 위해선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이 거론됐다. 최근 여론조사(2024년 11월, 미디어리서치)로는 대통령 4년 중임제가 53.8%로 압도적 1위다. 5년 단임제(21.6%),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분담인 이원집정부제(9.1%), 의원내각제(6.8%) 순이다. 5년 단임은 국민이 선출권만 가졌던 반면, 4년 중임제는 선출권과 현직 대통령 심판권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의회 다수로 선출된 총리가 내치를, 대통령은 외교·안보를 관장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개념은 권력 분산의 공통적 대안이었다. 결선투표제로 ‘과반 대통령’의 정당성을 부여하자는 제안도 절대다수다.

최근 정국은 불가침의 민주주의 원칙인 삼권분립을 더 확고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미국은 1791년 제정 헌법에서 연방대법관에게 종신 임기를 부여하고, 의회가 대법관 급료조차 깎을 수 없도록 사법부 독립을 못 박았다. “어느 누구도 자기 사안엔 판관이 될 수 없다”는 삼권분립의 미국 헌법은 숱한 인종·계층 갈등을 헤쳐 오며 최강대국으로 만들어 준 토대였다.

김영옥 기자
대통령제·내각제 요소가 애매하게 뒤섞인 우리나라에선 대통령과 의회의 명확한 분립, 견제도 과제다.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 금지, 정부 법률안 제출권 폐지, 대통령 임명직의 국회 동의 확대가 해법으로 제시돼 왔다. 정쟁의 근원이던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제한, 국감 내실화, 신상털기 청문회 개혁 등은 ‘평화성’을 위한 제언이다. 국민주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의원 자신의 사안(선거제도 개혁, 세비 결정, 징계 의결)엔 국회 내에 중립적인 ‘제3자적 시민 숙의 기구’를 두어 구속력을 주자는 제안은 신선하다.

‘보편성’을 위해 지방분권 정신을 명확히 선언하고 중앙·지방 정부 간의 권한·책임, 협력 의무도 선명히 해줘야 할 새 헌법이다. ‘효율성’ ‘미래성’을 지닐 헌법에는 ‘시장경제’ 원칙의 확고한 천명과 함께 경제 민주화를 위한 국가의 개입 범위, 재정 역할, 국가 채무와 복지 지출 비율의 최적 균형(optimal equilibrium)도 담아내야 한다. 특히 ‘보편성’과 ‘효율성’의 충돌은 가장 숙고해야 할 개헌의 지점이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장단점을 비교, 토론할 공론의 장에서 이 같은 나라의 미래 기조를 정리하고 가야 할 때가 아닌가. 다가온 미래인 AI와 인간의 상생, 인간 권리 보호, AI 주권(AI sovereignty)과 국제 연대의 공존 논의 역시 새 헌법에 ‘미래’라는 가치를 더해 줄 터다. 지속 가능한 환경, 핵의 평화적 사용, 재생에너지의 적정 비율(RES·Renewable Energy Share), 블록체인 기반의 전자투표를 통한 선거 참여 확대 등이 모두 미래로의 계약서에 반영돼야 할 우리의 삶이다.

사사오입·유신…정치, 개헌에 악몽 씌워
(54년 개헌-사사오입)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이 통과되자 국회 본회의장은 난장판이 됐다. [중앙포토]
가장 엄중한 책임을 물을 대상은 정치다. 정권은 늘 “나라가 위기인데 개헌이 다른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며 반대하기 일쑤였다. 기득권 지키기의 핑계였다. “재집권 꼼수에 놀아나면 안 된다”는 야당의 화들짝 손사래도 한몫했다. 발췌, 사사오입, 유신, 국보위 개헌 등 ‘개헌’이란 단어에 악몽을 심어 놓은 주범은 바로 정치였다. 그러나 지금 그 어떤 정치의 반대도 새 시대, 새 계약서가 필요한 공동체의 절실함을 넘어설 수는 없다.

(72년 개헌-유신헌법)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제도화한 유신헌법 공포식. [중앙포토]
국민이 자기 삶과 계약서 사이의 적합성에 의문이 생기면 그때가 바로 개헌의 적기다. 헌법학자인 브루스 애커먼은 이 분수령을 ‘헌법적 순간(Constitutional Moment)’이라고 규정한다. 그 헌법적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향후 60년의 대한민국을 도약시킬 60번째 트리거는 바로 미래로의 개헌이 돼야 한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최훈([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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