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마의 거인이 말 등에서 내려온다. ‘경마 대통령’ 박태종이 60세 정년을 채우고 은퇴한다. 21일 과천의 렛츠런파크에서 열리는 서울 경마 1300m 제6경주는 그의 마지막 레이스다.
은퇴 경기를 사흘 앞둔 18일 렛츠런파크에서 박태종을 만났다. 1987년 4월 데뷔한 박태종은 38년 넘는 세월 동안 1만6014번 출전해 2249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경마 최다승 보유자다. 150㎝, 49㎏의 왜소한 체구지만 그는 한국 경마에서 누구보다 큰 사람이다. 후배 기수였고 지금은 조교사로 변신한 이신우는 “박태종 기수는 한국 경마가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라고 SNS에 헌사를 올렸다.
충북 진천에서 나고 자라 스무 살에 상경한 그는 택시·굴착기 기사를 꿈꾸다 경마와 인연이 닿았다. 친척의 권유로 기수에 도전해 1986년 기수 후보생이 되고 이듬해 데뷔했다. 그는 “고교 때 친구가 기수를 해보라고 했다. 그때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냐고 생각했다”며 “그때 알았더라면 더 빨리 기수를 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소탈한 성품에 말수가 적지만 후배들은 그를 따른다. 성직자처럼 한결같은 그의 삶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 4시 반이면 눈을 뜬다. 오전 5시에 집을 나서 5시 반이면 경마장에 도착해 6시부터 말들과 함께 경주로를 달린다. 새벽 조교를 마치고 나면 아침을 먹고 근력을 키우는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 마사지와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후 퇴근한다.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든다. 데뷔 이후 38년간 지켜온 루틴이다. 그는 “이제 은퇴하면 알람 시간을 오전 6시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술·담배도 하지 않는다. 그는 “술은 원래 못 마시는 체질이다. 담배는 앞으로도 피울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술·담배는 없지만 그에겐 가족이 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을 묻자 “아내가 100일 된 딸을 안고 처음 경마장에 온 날 대상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때”라고 1999년을 회고했다. 은퇴 후 계획을 묻자 “아내와 대만에 여행 갈까 계획 중”이라며 “캠핑카를 타고 아내와 전국을 돌아다닐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아내 이은주씨와는 1998년 팬의 소개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했다. 아내는 163㎝로 그보다 한 뼘은 크다.
그는 데뷔 14년째이던 2000년 통산 722승으로 통산 최다승 1위에 우뚝 올라섰다. 한국 경마의 1인자가 된 순간이다. 2006년에는 한 해에 120승을 거뒀다. 매주 2번 넘게 우승한 것이다. “그땐 말만 타면 우승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1000승, 1500승을 거침없이 돌파하고 2016년 5월엔 대망의 2000승 고지를 밟았다. 그리고 4개월 후 큰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낙마한 건 일일이 셀 수도 없다. 입원도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흉추 압박골절 등 큰 부상도 서너 차례 입었다”며 “가장 힘든 건 세 번째 무릎 수술이었다”고 말했다. 2016년 9월 주로 방해에 따른 낙마로 무릎을 다친 후 10개월이나 치료를 받았다. 2017년 복귀 후 2주 만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는 “무릎이 아프니까, 아무래도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또 너무 쉬다 보니 출전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돌아봤다.
전성기가 끝난 허탈함을 그는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는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우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걸 받아들였다. 다만 “무릎이 약해 그 주변 근육을 키우는 운동은 더 열심히 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하자고 다짐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후배 문세영(45)은 2054승으로 그의 기록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경마 대통령의 뒤를 잇는 그의 별명은 ‘경마 황태자’다. 박태종은 “지금 다쳐서 한 달째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빨리 회복해서 나보다 더 훌륭한 기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기수들은 40대에 접어들면 대체로 조교사로 변신을 꿈꾼다. 그러나 그는 “조교사는 (스트레스로) 전부 고혈압 약을 먹고 있더라”라며 “후배 기수를 양성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