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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유럽 따라하다 ‘규제 갈라파고스’에 갇힌 한국

중앙일보

2025.12.18 07:18 2025.12.1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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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성 연세대 객원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기술혁신연구회장
유럽 경제는 누적된 위험의 둑이 터지는 형국이다. 독일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공장 폐쇄와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고, 프랑스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 부채 때문에 국가 신용등급이 강등됐다. 수년 전부터 유럽연합(EU) 스스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개혁을 시도해왔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지금 유럽이 몰락의 길에 들어선 근본 원인은 생산성 정체에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빅테크 기업들을 중심으로 파괴적인 혁신을 거듭해왔지만, 유럽은 현실에 안주했다. 변변한 인공지능(AI) 기업 하나 없으면서 유럽 국가들은 “AI 혁명은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며 산업 진흥보다 규제를 앞세웠다. 미국 기업이 과감한 구조조정과 자동화 투자로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동안 유럽 기업들은 고용유지 제도에 묶여 일자리 지키기에 급급했다. 변화를 거부하고 규제의 성을 쌓은 대가를 유럽은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유럽, 규제 때문에 생산성 정체
한국, 유럽 모델 무비판적 모방
일본 수준으로 규제 완화해야

문제는 대한민국이다. 미국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2004년에 출간한 『유러피언 드림(The European Dream )』이 영향을 주면서 한국은 ‘삶의 질’과 ‘안정’을 중시하는 유럽식 모델을 비판 없이 동경하며 모방해 왔다. 에너지 빈국인데도 무리하게 ‘탈원전’을 강행했고, 제조업과 소프트웨어 산업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인데도 경쟁국들보다 더 과도하게 화학물질과 AI를 규제했다. 그 결과 한국은 유럽보다 더 심한 ‘규제 갈라파고스’로 전락했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조차 “한국의 규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을 정도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화학물질 규제다. ECCK는 2025년 백서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의 화학물질평가법(화평법)과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서로 다른 기준을 들이대며 중복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고 더 심각한 것은 규제의 함량 미달과 파급효과다.

정부는 과학적 평가 역량도 없이 유럽의 겉모습만 흉내 내며 규제를 남발해왔다. 결국 해외 경쟁 기업들은 문제없이 쓰는 필수 화학물질을 한국 기업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공론화도 없었고, 평가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다. 외국계 기업은 해외에서 쓰면 되지만, 도망갈 곳 없는 한국 제조업체들엔 치명적이다. 해결책은 관련 부처 기능을 통폐합하고 일본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다.

내년 3월 시행을 앞둔 ‘노란봉투법’은 가뜩이나 힘겨운 기업 입장에서 보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ECCK는 하청기업이 원청을 상대로 협상을 요구하는 ‘사용자 범위 확대’를 걱정하는데, 진짜 뇌관은 ‘노동쟁의 대상의 확대’다. 경영 활동의 일부만 수행하는 외국계 기업엔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모든 경영 판단이 국내에서 이뤄지는 한국 기업엔 생존이 걸린 문제다. 노란봉투법은 즉각 중단해야 마땅하다.

무분별한 면책 특권을 주는 대신 독일식 ‘노동 이사제’ 도입을 공론화하면 어떨까. 독일의 경우 노조 추천 이사가 경영에 참여하되 이들이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명확한 법적 책임을 지운다. 지금처럼 노조가 권리만 주장할 게 아니라 책임도 함께 지도록 하면 더 합리적이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실행이다. 안타깝게도 정부가 강성 노조에 휘둘려 스스로 규제를 개혁하지 못한다면 시장이 심판할 것이다.

최근의 환율 급등(원화 가치 급락)은 단순히 대외 변수 때문이 아니다. 금리를 올릴 수 없는 한국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시장이 간파하고 원화 약세에 베팅한 결과다. 노란봉투법이 시행되고 산업 현장에서 혼란이 벌어지면 환율은 더 요동칠 것이다. 만약 외국계 기업의 ‘코리아 엑소더스’가 시작되면 원화 가치는 속절없이 추락할 것이다.

한국은 기축통화국인 유럽과 상황이 다르다. 유럽 경제가 어렵다지만 달러 대비 유로 환율은 지난 5년간 4.39% 상승한 반면, 원화 환율은 35.5% 상승했다. 유럽은 경제가 어려워도 유로가 버티지만, 한국 원화는 신뢰를 잃으면 끝없이 추락한다. 유럽을 꿈꾸며 규제의 벽에 갇혀 혁신을 거부한다면, 유럽 같은 정도의 성장 정체가 아니라 한국경제가 아예 침몰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곽노성 연세대 객원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기술혁신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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