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홀로 남아있는 황궁 아파트('콘크리트 마켓'). 거대한 해일이 몰려와 고층을 제외한 전층이 물에 잠겨버린 아파트('대홍수').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공간인 아파트를 배경으로 멸망 후 세상을 그린 아포칼립스 영화 두 편이 잇따라 관객과 만난다. 왜 아파트일까.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사는 공간인 만큼, 거대 재난 앞에 민낯을 드러내는 이기적 욕망과 갈등, 희생 등 인간 본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쉽기 때문이다.
먼저, 3일 개봉한 '콘크리트 마켓'은 아포칼립스 문법에 충실한 영화다. 2023년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세상이 폐허가 됐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황궁 아파트에도 장(마켓)이 선다.
쓸모 없어진 화폐를 대신하는 건 통조림이다. 오래 보존할 수 있고 정량으로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팔 게 없는 여자들은 8층에서 몸을 팔며 비참한 삶을 이어간다.
뛰어난 사업 수완과 카리스마를 지닌 상용(정만식)과 그의 수하 태진(홍경), 철민(유수빈)이 황궁 마켓을 지배하는 가운데, 정체불명의 소녀 희로(이재인)가 등장해 시장 질서를 뒤흔든다. 상용 일당을 서로 불신케 하는 지략과 경제 지식을 활용해 견고해 보이던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내달린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그간 아포칼립스물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10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속 10대들은 재난 후 세상에서 배움과 돌봄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른 채 어둠과 절망의 그늘 속에서 스스로 성장해간다. 의지하고 존경할 만한 어른도 없다.
아직 종말이 닥치지 않았을 뿐, 혼돈과 불안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요즘 청소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공감할 부분이 많다.
홍기원 감독은 "보고 배울 멋진 어른이 없는 세계에서 아이들이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지 눈 여겨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상용이 어떻게 절대 권력자가 됐는지 등 영화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이 궁금하다면 23일 웨이브에서 공개되는 7부작 시리즈를 보면 된다.
19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는 제목에서부터 거대 재난을 예고한다. 소행성 충돌로 빙하가 녹아내려 지구 대부분이 물에 잠기는 대재앙이 발생하면서, AI(인공지능) 개발자 안나(김다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빠른 속도로 물이 차오른다.
짐도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아들 자인(권은성)과 함께 아파트 고층으로 대피하려 하지만, 계단은 이미 주민들로 가득 차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집채 만한 쓰나미까지 몰려온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인력보안팀 희조(박해수)는 안나에게 "인류를 구할 마지막 희망인 당신을 안전 지대로 데려가겠다"고 말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건다. 아들 자인을 두고 가야 한다는 것.
아수라장이 된 아파트에서 절도와 강도 행각을 벌이는 불량배들, 그 와중에도 타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부 주민들. 영화는 익숙한 재난 영화의 흐름을 따르지만, 어느 순간 SF로 방향을 전환한다.
AI에 감정 엔진을 결합시켜 멸망 후에도 인류를 존속시키려는 시도의 중심에 안나와 자인이 있다는 설정이다.
다소 난해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전개가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는 오로지 '모성애'라는 종착역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린다.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을 시키려 하는 모성에 방점을 찍는다.
드라마와 SF의 이종 교배가 매끈하게 이뤄진 작품은 아니다. '모성은 위대하다'는 메시지 또한 별반 새롭지 않다. 하지만 곧 현실이 될 지 모를 기후 붕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선 나름 의미가 있다.
김병우 감독은 16일 제작보고회에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것에 대해 "아파트라는 공간도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봤을 때 비슷해 보이지만, 각자 개인의 우주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사랑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