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9일 “우리 국민에게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수천 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원산 갈마에 가고자 할 것”이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역점을 두고 개발 중인 국제 원산 갈마 지구 ‘평화 관광’ 구상을 밝혔다. 북한과의 교역이나 우리 국민의 방북 등 대북 접촉을 전면 금지한 5·24 조치는 “이미 사문화 상태”라며 제재 완화를 추진하겠다는 점도 다시 확인했다
정 장관은 이날 오전 서울 도렴동 정부청사별관에서 열린 외교·통일부 업무보고에서 “2026년을 한반도 평화 공존의 원년으로 만들겠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어 내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미 대화도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장관은 이날 오후 업무보고와 관련한 언론 브리핑에서 “정세 변화에 부응해 남북 교류 협력에 대비한 창의적 구상”을 제안한다면서 원산 갈마 관광 구상을 띄웠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 프로젝트를 힘차게 추진했던 2018년, 2019년에 아마 남쪽 관광객을 염두에 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제3국 재외동포-중국 관광객-국민’ 순으로 원산 갈마지구의 개별 관광을 추진하겠다며 구체적 계획도 소개했다. 그는 “첫 단계로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유럽 등 제3국 여권을 갖고 있는 해외 동포들이 내년을 원산 갈마 방문의 해로 정해 대대적으로 방문을 했으면 좋겠다”면서 “정부로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했다. 최종적으론 “우리 국민의 원산 갈마 관광이 실현되는 그런 단계를 상상하고 있다”면서다.
다만 제3국 국적인 재외동포나 국민이 북한을 관광할 경우 안전 담보, 대북제재 위반 소지 등에는 즉답을 피했다. 개별관광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위반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관광 중 북한에서 수출 금지 품목을 구매하거나 반입 금지 품목을 가져가는 등 의도치 않게 제재 위반에 연루될 수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다. 또 정 장관이 언급한 일본은 지속적으로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캐나다 국민 역시 북한이 장기간 억류된 적이 있다.
이와 관련, 정 장관은 “재외동포가 원산 갈마를 갔을 때는 북한이 받아들인 것이고 초청한 것”이라며 “북한이 원산 갈마를 국제 관광 명소로 하기 위해서 당연히 안전에 관한 것은 충분히 제공하리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비공개 업무보고에선 정부의 독자 제재인 5.24 조치와 관련한 이재명 대통령의 질의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정 장관은 “비공개 사안”이라며 즉답을 피하면서도 “5.24조치는 사문화 상태”라고 말했다. 5·24 조치의 해제 선언을 추진하는지에 대해서도 “결국 타이밍이 문제”라며 “발표를 한다면 통일부가 하게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5·24 조치는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가 발표한 독자 제재다. 남북 교역 중단,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중단, 국민 방북 금지 및 북한 주민 접촉 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5·24 조치가 없더라도 북한의 다양한 기관 및 개인과의 교역 등 경제적 이익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행위 대부분은 유엔 안보리 제재로 금지된다. 또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며 남한과의 단절을 선언한 가운데 5·24 조치 해제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는 동인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런 통일부의 구상에 대해 정부 내 공감대가 형성된 건 아니란 분위기도 감지된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통일부의 업무보고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사실 가슴이 뛸 정도로 ‘저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고, 천재일우의 기회로 저도 느끼고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그러나 방법론은 분명히 다르다”면서 “그런 말씀을 오늘은 아니지만 저도 드린 바 있고, 대통령께서도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으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최근 한·미 외교당국 간 대북정책 협의를 둘러싸고 촉발된 외교부와 통일부 간 갈등은 이날 업무보고에서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공개된 모두발언에서 외교부에 “적극적·능동적 업무 수행”을 주문하며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료를 살펴보다 “책 잡을 게 별로 없어 아쉽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통일부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남북 간 신뢰가 조금이라도 싹틀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고, 그 역할은 역시 통일부가 해야 한다”고 힘을 실어줬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날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이 대통령은 “각 부처들이 고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이어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 등 관계 부처가 함께 논의하는 ‘안보 관계 장관회의’를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고 대통령실이 전했다. 앞서 정 장관은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이른바 ‘동맹파’ 비중이 높다며 대통령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 대통령은 NSC 구조 개편보다는 외교·안보 부처 장관끼리 진행하는 별도 회의를 만들어 이견을 조율하라고 지시한 셈이다.
외교부와 통일부는 차관급 소통 채널도 가동하기로 했다. 정 장관은 이날 업무보고 후 브리핑에서 김남중 차관이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정보 공유를 위한 월례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교부와 통일부의 차관급 정례 협의는 2005년 정동영 장관 재임 당시에도 간담회 형식으로 운영됐는데 20여 년 만에 비슷한 소통 채널이 다시 구축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