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500원 선에 육박하면서 정부의 움직임이 긴박해졌다. 18일 기획재정부는 ‘외환 건전성 제도 탄력적 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외환 규제를 완화해 달러가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넓히고, 금융사가 보유한 외화도 시장에 풀도록 유도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날 대통령실은 국내 7개 대기업 관계자를 불러 환율 관련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금융감독원장도 해외주식 영업이 과열됐다며 증권사를 압박하고 나섰다.
정부가 총력전에 나선 건 국민연금 역할 확대와 한국은행의 외환스와프 연장 발표 등의 대책에도 환율의 고공 행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은 이런저런 대책에도 떨어질 줄 모르고 있다. 현재의 환율은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의 평균치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고환율 상황에 대해 “위기라고 할 수 있고, 걱정이 심하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17일 “국가 부도 위험이 있는 전통적인 금융위기는 아니다”면서도 “물가 영향과 성장 양극화 등을 생각할 때 환율이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웬만해선 환율의 절대 수준을 두고 높다 낮다는 식의 평가를 하지 않는 외환 당국이 ‘위기’를 언급한 건 이례적이다.
실제 고환율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경제의 내상은 깊어지고 있다. 당장 우려되는 건 들썩이는 물가다. 한국은행은 현재 수준의 환율이 이어지면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현 전망치인 2.1%에서 2%대 초중반까지 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내수 위축에 신음하는 자영업자, 대기업보다 환율 대응 능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이 입을 피해도 우려된다. 여기에 이 총재가 우려한 ‘환율발(發)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갈등 격화’도 먼 얘기가 아니다.
이를 고려하면 정부의 비상 대응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자칫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0원이 뚫릴 경우 쏠림 현상이 더욱 급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과 증권사, 국민연금의 팔을 비트는 방식은 단기 대책이자 대증 요법일 뿐이다.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에도 환율이 고공 행진하는 건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아니라 경제 체질의 취약성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투자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풀지 않는 것 역시 원화 가치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원화판(版) ‘코리아 디스카운트’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경제의 저성장 기조로 인해 미국보다 기준금리가 낮은 ‘역전’ 현상이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경기부양을 위한 반복된 돈 풀기도 원화 값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문제는 이런 거시경제 환경이 반전될 조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기획재정부 업무 보고에서 “내후년 예산 역시 확장 정책을 기반으로 편성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한·미 관세 협상으로 향후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직접 투자해야 할 돈도 2000억 달러에 달한다.
구조적 문제는 구조적 대책으로 대응해야 한다. 근본 처방은 경제 체질을 개선해 매력도를 높이고, 재정·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밖에 없다. 무엇보다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과감한 구조개혁, 규제 완화 드라이브를 다시 걸어야 한다. 금리 인하 기조를 사실상 접은 한국은행에 이어 정부도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 확보 방안과 의지를 천명하고 시장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서학개미’도, 기업도, 국민연금도 자발적으로 국내로 눈을 돌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