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경북 안동시 일직면. 150㎡ 남짓한 면적의 부지를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완전히 무너진 채 방치된 건물이 보였다. 폭삭 내려앉은 건물은 기왓장이 부서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불에 타 새카만 숯덩이가 된 대들보가 널브러져 있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찾지 않은 탓인지 잡초가 허리 높이까지 자란 모습이었다.
이곳은 경북 안동시 문화유산 제113호로 지정된 상현정(象賢亭)이다. 1500년대 조선 중기 구담서당(龜潭書堂)이 허물어진 뒤 후손들이 1934년 다시 세운 향토문화유산이다. 지난 3월 의성과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경북 북부지역 5개 시·군을 휩쓴 ‘괴물 산불’에 전소했다. 피해 면적이 경북만 9만9490㏊에 달하고 주불 진화 시간에 총 149시간이 걸렸던 역대급 산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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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진 200여년의 고택
같은 날 찾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괴와구려(愧窩舊廬·안동시 문화유산 제41호)는 아예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의성 김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고택으로 2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곳 역시 지난 3월 산불이 덮치면서 사라졌다. 고택이 있던 곳은 완전히 철거됐고 그 자리를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
산불 피해를 입은 향토문화유산이 9개월이 지나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지정유산이 아닌 비지정유산(향토문화유산)인 탓에 정부의 지원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서다.
국가유산은 국가지정유산이나 시·도지정유산과 같은 ‘지정유산’, 지정되지 않은 국가유산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국가유산인 ‘비지정유산’으로 나뉜다. 비지정유산은 일반 주택으로 간주해 산불 피해가 나면 주택 지원금만 지급하고 복구 관련 지원은 나오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지난 3월 산불이 주택 소유주의 노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역대급 재난이었고, 향토문화유산은 일반 주택과 달리 보수에 거액이 들어가는 것을 고려해 복구 지원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8일 경북도에 따르면 지난 3월 발생한 산불로 의성·안동·청송 등 3개 시·군에서 총 10건의 향토문화유산이 전소 또는 일부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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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비지정유산 복구에 40억원 들어
특히 안동이 전소 피해가 커 괴와구려를 복구하는 비용은 12억7890만원, 안동시 임하면 김씨재사 5억9900만원, 일직면 동리재사 4억6890만원, 상현정 2억4000만원 등이 소요될 것으로 파악됐다. 10개 향토문화유산을 복구하는 데 드는 총비용은 40억5000만원으로 추산된다.
경북도와 피해 소유주들은 지난 3월 발생한 산불의 복귀 지원책 등을 담은 ‘경북·경남·울산 초대형산불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에 비지정유산 복구 지원 관련 조항이 포함되도록 건의했었다. 하지만 해당 특별법은 비지정유산에 대한 구체적인 복구 지원 조항이 빠진 채로 지난 9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다만 이 법안 제5조 제1항의 제1에 ‘법률에 따라 지원 또는 보상한 사항 외에 추가적인 지원 사항’을 심의·의결한다는 여지를 남겨뒀다.
괴와구려 소유주인 김기현씨는 “작은 수리는 살면서 스스로 하면 되고 큰 수리는 지원을 해 주기 때문에 주체가 어디든 문제 될 것이 별로 없어 문화유산 등급에 신경 쓰지 않았다”며 “뜻하지 않는 화재피해를 입고 보니 행정적 기준이 복구를 위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고택은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오래된 주택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며 “괴와구려 역시 13대 종가집으로 이 집을 뿌리로 태어난 수천의 후손들이 있고 그들에게 고향이라는 단어의 실체적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고택은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 모두의 귀중한 자산이고 문화유산이고, 개인이 지키고 복구하기에는 힘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며 지원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