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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면전서 李철학 꺼낸 정동영…'명심' 앞세운 자주파 '총공세'

중앙일보

2025.12.21 00:20 2025.12.21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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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이 지난 1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외교부(재외동포청)·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는 모습. 정 장관의 오른쪽은 조현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한·미 외교당국이 정례적인 대북 정책 조율 협의에 나서면서 20여년 묵은 ‘자주파 대 동맹파’ 간 갈등이 다시 불거진 가운데 주도적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자주파가 총공세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이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상황을 틈타 '통일부 장관-여당 대표-원로 그룹'이 삼각편대를 구축, 정부 초기에 아예 동맹파를 눌러놓을 기세다.



정동영, 조현 면전서 "李정부 철학 설명하겠다"

자주파의 선봉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서 있다. 지난 19일 외교·통일부 업무보고에서 공개적 파열음은 없었지만, 정 장관은 "남북관계에 중심 둔 한반도 문제 해결"을 강조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이재명 정부의 철학을 설명하겠다"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부터 레닌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평화공존 노선까지 훑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뿌리부터 대통령과 인식을 함께 하고 있다는 걸 강조한 셈이다. 정 장관은 이전에도 "이재명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 정동영"(10월 14일 국정감사) 등의 주장을 내놨다.

정 장관은 업무보고 사후 브리핑에서는 "'완전한 남북 관계 단절 시대에 어떻게든 바늘구멍이라도 뚫어라' 하는 것이 대통령님의 명령"이라며 "외교 안보 부처의 존재 이유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 대통령의 신념, 철학이 기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참모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 건 정부 내 동맹파에 대한 공개적 견제구나 마찬가지였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업무보고 사후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정 장관은 평화적 두 국가, 9·19 군사합의 선조치, 한·미 연합훈련 조정 등을 공개 주장해 논란을 불렀는데, 이는 ‘명심(明心)’은 자신의 편이란 자신감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앞서간다는 우려와 함께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 분담이란 해석이 동시에 나왔다.



"나는 궐 밖 사람" 통제 불가 스피커 영입

국무위원 신분인 정 장관이 제기하기에 적절치 않은 주장은 범여권 진영 전체가 측면에서 지원하는 모양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7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사사건건 미국 결재를 받아 실행에 옮기면 남북관계를 푸는 실마리를 꽁꽁 묶는 악조건에 빠져들 수 있다"며 "정동영 통일부의 정책적 선택 결정이 옳은 방향이고, 이를 지지한다"고 언급하면서 화력 지원에 나섰다.

지난 17일 오전 강원 춘천 퇴계동 더불어민주당 강원도당에서 열린 강원 현장 최고위원회에서 정청래 당 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정 대표는 당 내에 '한반도평화전략위원회'(가칭)를 만들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 등의 합류를 검토하고 있다.

특히 '순수 야인'인 범여권 진보 원로들은 원색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스피커로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 정세현 전 장관은 지난 19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나는 궐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서도 외교부를 향해 "미국이 하라는 것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그런 것이 습관화된 사람들"이라고 직격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에 대해서는 "늠름하게 사실을 왜곡한다"고 실명 비판했다.

이들은 위성락 실장이 상임위원장을 맡는 NSC 구조도 문제삼고 있다. 범여권 전직 통일부 장관들은 지난 3일 한 좌담회에서 국가안보실 차관급 차장 3명도 장관급과 동등한 상임위원 자격으로 NSC에 참여하는 걸 비판했다. 지난 15일에는 입장문을 통해 한·미 정례 대북 정책 조율 협의에 대해 "제2의 워킹그룹"이라며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 갈등에 불을 지폈다.
지난 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반도평화포럼 주최 '정부 출범 6개월, 남북관계 원로 특별좌담'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기념촬영을 위해 대기해 있다. 왼쪽부터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 정 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스텔스 모드' 외교부…입장 불변

동맹파의 주축인 외교부는 직접적인 충돌을 자제하는 모양새다. 통일부가 '외교부 패싱'을 선언해도 공개 대응하지 않고, 한·미 협의가 워킹그룹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데만 중점을 뒀다.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북핵 문제를 전면에 배치하지 않고 비중도 줄였다.

그렇다고 대북 정책 운용 과정에서 미국과 긴밀한 조율이 필수라는 입장이 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주파의 공세가 이런 조율의 필요성을 더 키웠다는 기류다.

외교부 내에서도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시대 들어 동맹의 구조 자체가 변하면서 맹목적인 '동맹 신봉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다는 인식은 확고하다. 지금과는 다른 동맹 관리가 필요한 셈인데, 이재명 정부가 북·미 관계 개선을 중심에 두고 남북관계와 선순환을 꾀하는 '페이스메이커' 기조를 유지하는 이상 동맹파가 움직일 공간은 확보된 측면이 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1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업무보고 사후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익명을 원한 전문가는 "동맹파는 정상외교를 통해 대미 외교의 중요성이 대통령에게 각인된 만큼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며 "대통령실로부터 '자제하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만큼 논쟁이 조용히 사그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짚었다.



자주파 손 들어줬던 진보 대통령들…명심은?

과거 진보정부에서는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자주파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대통령이 자주파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는 게 정부 안팎의 관측이다. 이 대통령은 문재인·노무현 전 대통령과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접근법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업무보고에서도 "북한이 남한의 북침을 걱정한다"는 등 논란의 발언을 하면서도 핵심인 대북 정책의 주도권과 관련해서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은 채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이념적 가치 지향보다는 실효적이고 실용적인 정책 결정을 우선시하는 성향을 다시 드러낸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외교부(재외동포청)·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뉴스1
이 대통령이 "각 부처가 고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우리가 대외 외교 정책을 선택할 때도 공간을 넓히는 효과도 있다"(19일 대통령실 서면 브리핑)고 강조한 것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다.

다만 양측의 갈등이 지속하면서 불필요한 논쟁이 반복될 경우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이는 동맹이나 우방은 물론 북한에도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영교.심석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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