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제도 비평을 주로 다뤄왔지만, 나의 인문학적 관심은 역사와 기억을 향해 있다. 30여년간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융합적으로 다루어온 리움미술관에서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이나 공간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근·현대사의 기억이 남아 있는 건물이나 오래된 마을, 사찰과 성당을 즐겨 찾기도 한다. 경제적 효율과 개발 논리가 우선시되면서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기억의 터가 사라져가는 풍경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상실 중 하나다.
서울은 역사와 기억 축적된 땅
성장 위한 개발 불가피하지만
구도심의 골격과 구조 살펴서
서로 다른 시간 공존하게 해야
최근 종묘 앞 대규모 개발 논쟁을 지켜보며, 500년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서울을 우리가 역사 도시로서 체감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간 정부는 문화유산의 가치 회복을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와 경복궁·청계천·한양도성의 복원 사업 등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하지만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전통적 경관은 점차 도심 속에 고립되어 가고 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수도 설계를 주도한 정도전은 유학자로서 한양도성과 궁궐, 종묘와 사직, 사대문의 위치와 명칭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구현하고자 한 통치 질서를 도시 공간 속에 담아내려 했다.
리움에서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2015) 전시를 기획하며 한국의 전통건축뿐 아니라 서울 도심의 과거 역사를 깊이 들여다본 경험이 있다. 당시 ‘한양도성도’와 ‘동궐도’, 경복궁과 육조거리 모형, 종묘를 주제로 한 영상과 서울의 지형 변화 자료 등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역사와 기억이 축적된 장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인왕산·북악산·낙산·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조성된 한양도성 안의 구도심 지형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터를 경영하는 조선시대 국가 이념이 결합된 도시 구상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도성의 핵심축을 이루는 종묘는 조선 왕실의 제례 공간이자 오랜 시간이 축적된 기념비적 건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 묻힌 이러한 역사적 숭고함의 의미를 종종 인식하지 못한다.
이번 종묘 논쟁은 단순한 개발의 찬반을 넘어, 서울이라는 역사 도시가 어떤 공간 철학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서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대문 안의 도시재생과 개발을 피할 수는 없다. 문제는 문화유산으로부터 거리 규정과 고도 제한을 정하는 법적·물리적 기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도시 인문학의 관점에서 역사 도시의 정체성과 인간의 삶과 시간이 반복되며 축적된 비가시적 가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핵심이다. 특히 한양도성 안의 중심부는 그 어떤 곳보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공공적이며 무형의 가치를 지닌 공간이다.
구도심이 개발에서 뒤처지고 낙후된 배경에는 국가유산과 문화재 보호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 온 것도 사실이다. 보존 구역에서는 고도 제한과 각종 규제가 불가피하고, 그 부담은 종종 주민과 토지 소유주에게 집중된다. 역사적 공간의 보존이 개인의 희생에 의존할 때, 보존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국가유산청과 서울시 간의 행정적 갈등을 조정하고,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경우에는 규제의 공공성을 사회적으로 분담할 수 있는 보다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보완책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세계화의 결과로 대부분의 도시가 마치 고층 빌딩이나 랜드마크 경쟁처럼 비슷한 도시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역사적인 도시들에서도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이 조화롭게 화해하지 못한 채 충돌하곤 한다. 『영원의 건축』의 저자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이러한 전통과 현대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관계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개별 건축물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이 축적된 도시 패턴의 지속성이었다. 역사 도시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건축물의 높이나 새로움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의 주변 경관 관리에서 ‘맥락’과 ‘조화’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세계의 역사 도시들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과 마주해 왔다. 파리는 고도 제한을 통해 도시의 골격과 시선의 흐름을 지켜왔고, 로마와 교토는 현대적 편의의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오래된 도시 구조와 시간의 층위를 유지해 왔다. 그 결과 이 도시들은 과거에 고착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이 현재의 삶 속에서 공존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문화유산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시간이 축적된 기억의 구조이자 미래를 지탱하는 공공의 자산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단절이 아닌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질서를 지켜낼 때, 서울은 역사를 살아 있는 현재로 만드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