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도쿄역에서 야마가타(山形)현으로 향하는 신칸센을 타고 꼬박 3시간. 종착역 신조(新庄)에 내려 또다시 차로 20여분을 달리자 인구 약 3700명의 도자와(戸沢) 마을을 관통하는 강줄기가 맞이한다. 일본 3대 급류로 꼽히는 약 230㎞ 길이의 모가미(最上)강이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모가미강을 내려다보는 나지막한 언덕엔 낯익은 처마와 기와, 단청으로 치장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고려관(高麗館)이다. 국도 47호선에 붙어있는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도로 휴게소에 해당하는 ‘미치노 에키(道の駅)’다.
넓은 주차장에 붙어있는 음식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간판엔 일본어로 ‘본고장 한국의 맛, 한류식당’이라고 쓰여있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진동하는 가게 안에선 손님 서넛이 돌솥비빔밥과 김밥, 부침개를 먹고 있다. 대형 안내판엔 한글과 영어, 일본어로 된 고려관 소개가 적혀있다. ‘음식문화관, 민족문화관, 놀이마당, 휴게소 도자와의 역사(驛舍), 산사태 자료관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모가미강의 흐름이 고대 한반도 문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호친선의 교류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단을 향해 발길을 옮기자 이번엔 정겨운 얼굴의 해태 두 마리가 반긴다. 거대한 용이 새겨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고려관(高麗館)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현판은 38년간 한·일 관계 구축에 공헌한 김태지(1935~2025) 전 주일 한국대사가 쓴 것으로 한국에서 제작해 가져왔다.
흥겨운 K팝이 흘러나오는 역사 안은 한국 가게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제품으로 가득했다. 김치, 6년근 홍삼음료는 물론 빨간 고무장갑, 한국 소주와 라면, 양은냄비, BTS(방탄소년단) 사진까지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여행길에 도로를 지나가다 한국식 건물이 보여 들어왔다는 젊은 부부는 “한국 물건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며 즐거운 표정으로 물건을 둘러봤다.
판매점을 지나 긴 복도를 따라가면 한국 식당인 ‘코리나(Colina)’로 이어지는데 한쪽엔 한복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쓰치다 후미코(土田文子) 역장(驛長)은 다양한 한복을 보여주며 “보다 많은 사람이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한복을 늘릴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에 왜 고려관이 들어서게 된 것일까. 가토 후미아키(加藤文明) 도자와 촌장은 ‘풀뿌리 국제 교류’를 이유로 꼽았다. 1985년부터 충북 제천 송학면과 교류를 시작한 데 이어, 비슷한 시기 영농 후계자 감소를 고민하던 마을이 직접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덕에 한국과 필리핀 며느리가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서도 한국 며느리가 가장 많았다. 한때 70명에 달하는 많은 한국 며느리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레 문화 교류 속도가 빨라졌다. 솜씨 좋은 며느리들이 김치를 담그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88올림픽이 끝난 이듬해에 도자와로 시집와 두 아이를 낳은 오오토모 순호(大友淳浩·64)씨는 고려관 설립 초창기를 함께 했다. 그는 “한국 며느리가 많아지면서 일본 사람들이 고려는 잘 모르니 고려를 알려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한국과의 문화 교류에 적극적인 촌장이 강변 구릉지에 고려시대 궁궐을 본뜬 고려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고려관 건설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약 3만6000평에 달하는 부지에 당시 투입된 비용은 우리 돈 약 100억원.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고려관이 97년 문을 열며 이곳은 마을 활성화를 위한 중심지가 됐다.
한국 며느리들이 담그기 시작한 13종류에 달하는 김치도 한 몫 했다. ‘우메찬’ 김치 브랜드를 일궈 일본 전역으로 확장한 김매영(일본명 아베 우메코·64)씨도 그중 한 명이다. 한국 며느리들이 만든 김치는 고려관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본고장 맛’이란 입소문에 인기를 끌었다. 한국을 테마로 한 이색 시설을 보기 위해 관광버스를 대절해 학생들이 찾아올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라는 시대 흐름이 이어지면서 고려관에도 위기가 닥쳤다. 마을 인구는 고려관 설립 당시의 절반으로 줄었고, 건물 등 시설 노후화로 인한 보수와 재정 문제까지 불거졌다. 전체 시설 운영을 4명이 담당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자 도자와 마을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가토 촌장은 “재일본 대한민국 야마가타현 민단 본부 지원 등으로 유지 관리를 해왔지만 규모가 커 전면 수선은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마을 시설인 고려관의 위탁운영을 맡고 있는 모가미쿄바쇼(最上峡芭蕉)라인 관광주식회사에 따르면 연간 방문자 수는 2023년만 해도 6만5004명에 달했지만, 지난해엔 5만6667명으로 줄었다. 최근엔 인근에 고속도로까지 개통하면서 방문자 수가 약 9% 감소했다. 쓰치다 역장은 “고려관은 정말 소중한 존재”라며 “고려관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봄과 가을에 코스프레 행사를 열고 1년에 한 번 랜턴 페스티벌을 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지만, 방문객을 대규모로 불러오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최근엔 고려관의 안타까운 사정이 재일 동포 사이에 알려지면서 관심도 이어지고 있다. 이날 고려관을 보기 위해 오사카에서 찾아온 재일본한국인총연합회 방성민 기획분과 위원장은 “고려관 활성화를 위해 동포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고려관 쇠락을 바라보는 ‘한국 며느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오오토모씨는 “고려관이 되살아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한인타운에 버금가는 명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매영 대표도 “야마가타현에만 2500명의 동포가 있다”면서 “고려관이 동포들의 친정 같은 곳이 되고,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