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영국, 밤의 적막을 깨고 직물 공장에 횃불이 날아들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시작이었다. 역사는 이를 기술 진보를 거부한 기계 파괴 폭동이라 기록했지만, 사실 그들이 부수려 했던 것은 기계 자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기술 전환이 초래할 파국적 빈곤을 방치한 ‘사회의 무책임’에 돌을 던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비정한 시스템에 대한, 생존을 건 저항이었다.
200여 년이 흐른 지금, 기시감이 느껴진다. 대한민국은 ‘세계 3대 인공지능(AI) 강국’을 향해 국가적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수백조 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와 규제 혁파는 시급한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청사진엔 결정적인 질문이 간과되어 있다. 기술 엔진의 출력을 높이는 투자만큼, 그 속도에 튕겨 나갈 사람들을 위한 안전망은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기술 혁신 과정에서 실직자 양산
‘AI 영향평가’로 복지·고용 챙겨야
커지는 디지털 불평등 방치 안 돼
기술 낙관론자들은 반문한다. “혁신은 결국 낡은 일자리보다 더 많은 새 직업을 만들고 인류를 진보시키지 않았나?” 하지만 이 매끈한 거시적 명제는 잔인한 함정을 품고 있다. 구산업 붕괴와 신산업 태동 사이의 아득한 시차, 바로 그 전환의 계곡에서 질식해가는 구체적인 삶들은 통계 숫자 뒤로 철저히 지워진다는 사실이다. 인류라는 종(種)의 차원에서는 진보일지 모르나, 그 과도기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개개인에게 기술 혁신은 삶 전체의 파탄을 의미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은 당장 생계가 끊긴 가장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한국은 빈약한 안전망 탓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라는 비극을 안고 있다. 직업 상실이 곧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세상에서, AI가 초래할 고용 불안은 빈곤을 넘어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적 뇌관이 될 수 있다. 대비 없는 낙관론은 폭력이다. 우리는 화려한 발전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개인의 호소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고등은 이미 켜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선진국 일자리의 60%가 AI 영향권이라 했고, 한국은행은 청년 고용 감소의 대부분이 AI 노출 산업에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기술 진화 속도가 사회 조정 능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체가 아니라, 사회 안전 시스템의 붕괴를 예고하는 전조다. 이제 AI 시대의 복지는 시혜를 넘어, 이 고통스러운 전환기를 건너게 해줄 사회적 교량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적 대응이 시급하다.
첫째,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공공 영역의 ‘AI 영향평가’ 제도화다. 복지, 고용 등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공공 영역에 AI를 도입할 때, 인권에 미칠 치명적 영향을 사전에 검증해야 한다. 이미 유럽연합(EU)은 ‘AI 법’을 통해 고위험 AI에 대한 기본권 영향평가를 의무화했고 미국도 안전장치 마련을 지시했다.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알고리즘이 소외계층을 차별하는 디지털 불평등을 방치해선 안 된다. ‘선(先) 검증 후(後) 도입’ 원칙은 필수다.
둘째, 복지의 패러다임을 사후 구제에서 예방적 개입으로 전환해야 한다. AI는 역설적으로 위기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하는 도구가 된다. 연체 기록, 에너지 사용량 급감 등 데이터 신호를 분석해 가계 파산 전 개입하는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반도체 공장 건설만큼이나 시급한 사회적 투자다. 셋째, AI와 공존할 인간 고유성에 투자해야 한다. 지식 처리는 AI에게 맡기되,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공감과 돌봄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AI 시대 인간의 자리를 묻고 그 역량을 기르는 교육만이 대량 실업이라는 디스토피아를 막을 방파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기업이 국민 데이터를 학습 연료 삼아 창출한 혁신 이익을 사회안전망 재원으로 환류하는 데이터 배당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
기술은 미래로 나아가는 엔진이며, 사회안전망은 공동체 가치를 조향하는 핸들이자 주위를 돌아보게끔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다. 제어 장치 없는 고성능 자동차는 위험하다. 200년 전 러다이트의 교훈은 명확하다. 진정한 AI 강국은 기술 고도화만 이룬 나라가 아니라, 그 기술이 초래할 전환기의 고통을 조율하고 인간의 복지와 동행할 품격을 갖춘 나라다. 혁신을 향한 투자만큼 사람을 보호하는 시스템 구축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