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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의 시시각각] 포퓰리즘, 그 달콤한 독배의 최후

중앙일보

2025.12.21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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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마치 대한민국에 유전이나 금맥이 터진 것 같다. 요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드는 착각이다.

전북 정읍시는 내년 1월 전 시민에게 1인당 30만원의 민생지원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이학수 정읍시장은 “위기를 견디고 있는 시민들께 온기를 드리기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취지는 좋지만 문제는 돈이다. 310억원의 재원이 필요한데 정읍시의 재정자립도는 9.6%에 불과하다. 정읍시뿐이 아니다. 전남 순천시·보성군·고흥군과 충북 보은군·괴산군 등도 민생회복지원금 명목으로 전 주민에게 돈을 뿌린다.

정부·지자체 선심성 정책 남발
통화 급증해 원화값 추락하면
성실한 중산층도 가난해질 것

한국의 기초자치단체가 인건비 등 기본 운영 경비를 스스로 충당하려면 재정자립도가 최소 30%대 후반은 돼야 한다. 하지만 순천만국가정원 수입 등으로 비교적 사정이 나은 순천시의 재정자립도도 19%에 불과하다. 전국 시 평균(30%대 초반)에 못 미친다. 나머지 보성·고흥·괴산·보은군은 전국 최저 수준이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2024년 말 기준 국가부채가 4632조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는 GDP(국내총생산)의 181%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하는 공공부채(1738조원)에 국민연금 미적립부채(1575조원), 군인연금 충당부채(267조원), 공무원연금 충당부채(1052조원)를 합친 것이다. 물론 박 의원의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환율 방어에 동원되고 청년임대주택 재원 등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될 경우 국가가 연금을 주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다.

가계부채도 세계 최고를 찍었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한국의 가계신용(2248조원)과 전세보증금(1002조원)을 합친 가계부채는 3250조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지난 30년간 모든 정부가 저금리 정책, 대출 규제 완화, 재정 확대 등 총수요 부양정책을 펼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금융위기 압력을 높이고 있다. 올해 9월 기준 통화량(M2)은 4430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무려 352조원이 늘었다. 경기 부양을 위한 돈 풀기는 원화가치를 추락시키는 주범이다.

감사원이 새출발기금 감면 실태를 감사한 결과 월소득이 8084만원인데 빚 2억원을 감면받거나 4억3000만원의 가상자산을 보유하고도 1억2000만원을 탕감받는 등 ‘도덕적 해이’ 사례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적용받는 것은 금융계급제”라고 질타했다. 이 때문에 고신용자보다 저신용자의 금리가 낮아지는 왜곡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또 탈모·비만치료제를 건강보험에 적용하는 방안을 지시했다. 해당자는 좋겠지만 건강보험 재정지출이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늘어난 재정 부담은 주로 소득과 자산이 중간을 넘는 계층이 지게 된다. 문제는 중산층 이상도 세금과 사회보험 부담이 과중하면 빈털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통계청 기준 상위 1%의 순자산은 33억원이다. 이 중 부동산을 뺀 금융자산은 6억원 정도다. 이들은 은퇴 후 근로소득이 없어져도 부동산 보유세와 건강보험료로 연간 수천만원을 내야 한다. 상위 1% 순자산가도 은퇴 후 고정수입이 없다면 여생(평균 30여 년)을 마치기 전에 가진 돈을 전부 써버려 서민층으로 추락할 수 있다.

공짜 점심을 먹으면 그때는 좋겠지만 나중에 그보다 더 비싼 청구서를 받게 된다. 돈을 풀면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서민층에 가장 가혹한 세금이다. 부자는 부자대로 세금을 피해 해외로 탈출할 것이다.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그리고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우리가 이미 목격한 현실이다. 포퓰리즘은 싸구려 마약 ‘펜타닐’ 같은 것이다. 이에 중독되면 인간은 자율 의지를 잃은 좀비처럼 정부가 주는 최소한의 구호물품을 구하러 거리를 비틀거리며 배회하게 될 것이다.





정철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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