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당 원화가치가 1480원대로 주저앉았다. 8개월 만에 최저치로,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직후 환율과 맞먹는 수준이다. 원화값이 무너져내리자 대통령실은 연간 한도가 200억 달러(약 30조원)인 대미 투자의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22일 오후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 대비 원화값은 전 거래일 대비 3.8원 하락(환율은 상승)한 1480.1원에 마감했다. 주간 종가를 기준으로 원화값이 1480원대로 내려온 건 지난 4월 9일(1484.1원) 이후 8개월여 만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1410원대로 내려앉았던 원화가치는 이후 계속 하락하다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직후인 지난 4월 8일 1487.07원까지 갔다. 대선 이후 1300원대로 안정되는 듯했지만, 다시 탄핵 직후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날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현재 같은 상황이 지속할 경우 대미 투자를 조정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한·미 정부는 지난달 14일 통상협상을 마무리짓고, 한국은 3500억 달러(1500억 달러는 조선 분야 투자)를 미국에 투자하되 연간 한도는 200억 달러로 하기로 합의했다. 당시부터 이런 대규모 대미 투자가 원화가치를 끌어내리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
한·미 통상협상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내 ‘외환시장 안정성’ 항목엔 ‘대미 투자 양해각서의 약속 이행이 시장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일 경우, 한국은 자금 규모와 시기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다만 ‘미국은 선의(in good faith)로 이에 대해 적절히 검토할 것’이라고도 돼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충분히 강력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대미투자특별법 처리가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6일 대미투자특별법을 발의했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법 처리가 늦어질수록 대미 투자 시점도 늦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환율 총력전에 나선 배경엔 이 문제가 자칫 내년 지방선거의 악재로 부상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이던 지난 2월 “환율이 폭등해 이 나라 모든 국민의 재산이 7%씩 날아갔다”며 당시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을 비판했다. 그런데 당시 수준으로 원화값이 하락한 것이다.
리얼미터·에너지경제의 지난 15~19일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전주보다 0.9%포인트 내린 53.4%를 기록했다. 리얼미터는 “환율 등 민생·경제 불확실성이 겹치며 하락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내년 초 달러당 원화값을 1400원대 초반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총력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문신학 산업통상부 1차관은 이번 주 초 주요 수출 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만나 정부의 환율 대응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하지만 한 수출기업 관계자는 “달러는 가지고 있으면 다 풀라고 하고, 정작 대미 투자는 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속도를 조절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달러 공급 확대를 위해 계속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