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잃어버렸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까. HBM ‘재설계’라는 굴욕을 당했던 삼성전자가 6세대 HBM4 품질평가(퀄 테스트)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며 분위기 반전에 나서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기흥·화성 반도체 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전략을 점검하고 연구원들을 격려한 것도 HBM 주도권 회복에 힘을 싣는 행보로 해석된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엔비디아가 진행한 HBM4 품질 평가의 핵심 관문인 시스템인패키지(SiP) 테스트에서 전력 효율과 구동 속도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iP는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반도체 칩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 넣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다.
HBM은 단독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연산을 담당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 등과 결합해 제 성능을 낸다. 이 때문에 SiP 테스트는 단순히 개별 메모리 칩의 불량 여부를 확인하는 단계를 넘어, 서로 다른 공정에서 제작된 GPU와 HBM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충돌없이 데이터를 주고받는지 ‘상호 운용성’을 검증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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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4로 하이닉스와 격차 좁히는 삼성
당초 시장에서는 HBM 경쟁에서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크게 앞서 나갈 것으로 내다봤다. SK하이닉스가 지난 9월 업계 최초로 HBM4 양산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퀄 테스트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시제품이 기대 이상의 성능 안정성을 보여주면서, 양사의 초기 격차가 줄어들거나 뒤집힐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반전은 지난 1년여간 삼성이 절치부심한 결과다. 삼성전자는 이전 세대인 HBM3E(5세대) 개발 당시 발열과 패키징 최적화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올초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삼성의 성공을 확신한다”면서도 “새로운 설계가 필요하다”며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을 정도다. 실제 올해 상반기 글로벌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미국 마이크론에 2위 자리마저 내주며 3위로 밀려나는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기류가 달라졌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 지휘 아래 HBM 재설계에 들어간 삼성은 지난 9월, 수차례 고배를 마셨던 HBM3E 제품의 엔비디아 공급망 합류에 성공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글로벌 HBM 점유율 22%를 기록하며 마이크론(21%)을 다시 따돌리고 2위를 탈환했다. 1위인 SK하이닉스(57%)와의 격차는 여전하지만, 올 초 69%에 달했던 SK하이닉스의 독주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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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전담 조직’ 없애고 평시 체제로
삼성전자의 자신감은 지난달 27일 조직 개편에서도 엿보인다. 전 부회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7월 신설했던 ‘HBM 개발팀’을 해체하고, 이를 D램 개발실 산하로 재편한 것이다. 전담 조직이라는 ‘별동대’ 없이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HBM4 기술력 확보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만 HBM4가 탑재된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베라 루빈’이 내년 하반기에나 출시되는 만큼 내년 초까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모두 추가 품질 테스트와 수율 검증 작업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기흥·화성 반도체 캠퍼스를 시찰한 이재용 회장은 “과감한 혁신과 투자로 본원적 기술 경쟁력을 회복하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