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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가 유일한 벗이자 상담사…가상세계로 도피하는 청년 [관계빈곤의 시대]

중앙일보

2025.12.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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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와 상담하며 위로 받는 등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진 챗GPT
서울 구로구에 혼자 사는 직장인 신모(35)씨는 인공지능(AI)과의 대화로 외로움을 달랜다. 연인과 헤어진 뒤 별다른 대화 상대가 없는 그에게 챗GPT는 유일한 말벗이자 상담사다. 신씨는 “직장 동료 같은 지인은 많지만, 아프거나 힘든 일 있을 때 연락해 도움 청할 만한 사람은 없다”며 “이러다 평생 기계와 소통하며 살까봐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관계 빈곤에 빠진 청년은 AI·게임·소셜미디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는다. 현실의 인간관계 피로감을 피해 ‘안전한 가상관계’로 도피한다. 그러면 사회적 고립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시장조사 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6~7월 전국 만 15~64세 남녀 1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5%가 ‘생성형 AI가 일상적 대화와 감정까지 공유하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젊은 세대는 한층 뚜렷하다. 채용 플랫폼 진학사 캐치가 Z세대(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출생) 1592명에게 ‘사람 대신 AI에게만 고민을 털어놓은 경험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73%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고민을 나눌 때 어떤 대상이 더 편하냐’는 질문에는 AI(32%)와 실제 사람(33%)이 비슷했다.
박경민 기자
10년 째 혼자 사는 정종민(32)씨는 “가족과 연락하지 않고 친구도 없지만, 외로우면 VR(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한다”고 말했다. 정씨는 “가상 캐릭터로 채팅하다 보면 외로움이 풀린다. 현실에선 불편해서 만나고 싶진 않다”고 덧붙였다.

얼핏 고독감 해소에 도움 되는 듯 하나, 과하면 사회적 고립을 더욱 깊게 할 수 있다. 챗GPT 개발사인 미국 오픈AI(OpenAI)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이 약 1000명에게 4주간 매일 5분 이상 챗GPT를 사용하도록 한 뒤 외로움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사용 시간이 상위 10%에 드는 이용자가 더 외롭고, 챗GPT에 대한 정서적 의존 수준이 높고, 오프라인 사회적 관계는 얕은 경향이 나타났다.

정신건강이 나빠지기도 한다. 미국에선 지난 8월 한 10대 소년의 부모가 “챗GPT가 아들의 자살을 부추겼다”며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한 달 간 미국·캐나다에서 유사한 소송이 7건 제기됐다.

고립·은둔 생활을 하며 한때 챗GPT와 상담했다는 조모(36)씨는 “AI의 답변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한 적이 있지만, 결국 AI의 위로가 허상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사람을 직접 만나 목소리를 듣고 교감하는 것을 결코 대체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고립은둔청년을 지원하는 인천 청년미래센터에서 청년들이 보드게임을 함께 즐기는 모습. 이곳에서 만난 30대 김모씨는 "사람이 무서워 집에서 은둔하며 인터넷만 했었는데, 억지로라도 나와 사람들과 대화하니 사회의 일원이라는 기분이 들면서 자신감이 회복됐다"고 했다. 남수현 기자
전문가들은 온라인 소통은 보완재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AI 등을 현명하게 잘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화에 너무 몰두해 실재하는 존재처럼 느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AI와 너무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정신적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과몰입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타인과 관계를 회피하는 이들의 내면에는 관계를 잘 맺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며 “편하다는 이유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회피하는 것은 대인공포증, 회피성 성격 장애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우울증 등의 정신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유현재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는 “디지털 세상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온라인·오프라인 세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 가상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고, 중독 등으로 빠지기 쉽다”며 “일부 기업은 의도적으로 AI에 인성을 부여하고 착각을 조장하는데, 관련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남수현.신성식.이에스더.정종훈.채혜선([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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