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보드 빅에어는 ‘강심장들의 스포츠’, ‘설원의 도마’로 불리는 극한 스포츠다. 건물 10층 옥상 높이인 30m에서 활강한 뒤 점프대를 타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기술을 겨룬다. 단 한 번의 점프로 플립(공중제비), 회전, 보드 잡기 등 복잡한 동작을 모두 수행해야 하며, 착지까지 완벽해야 좋은 점수를 받는다. 부상 위험도 크다. 헬멧이 깨지면서 뇌진탕을 입을 정도의 충격도 자주 나온다.
이런 빅에어에 도전장을 낸 겁 없는 10대 소녀가 있다. 여고생 스노보더 유승은(17)이다. 유승은은 지난 14일 미국 콜로라도주 스팀보트 스프링스에서 열린 빅에어 월드컵 결선에서 합산 173.25점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스노보드 사상 빅에어 종목 월드컵 메달리스트는 유승은이 처음이다. 1차 시기에서 실수로 18.5점에 그쳤지만, 2차 시기 86.5점, 3차 시기엔 86.75점을 얻는 집중력을 보였다. 금메달을 딴 오니쓰카 미야비(일본)와의 차이는 불과 0.75점이라서 유승은은 단번에 내년 올림픽 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2008년생 유승은은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작년 10월 스위스 월드컵에서 데뷔했지만, 그 직후 부상으로 1년을 통으로 쉬었다. 당시 오른쪽 발목이 부러졌다. 지난 2월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 무리해서 출전했다가 같은 부위를 다시 다쳐서 복귀가 당초 예상보다 더 늦어졌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돌아온 그는 세 번째 월드컵 도전 만에 입상에 성공했다.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유승은은 “생애 첫 월드컵 메달을 따서 기쁘다. 힘들고 긴 치료와 재활을 버텨낸 보상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알고 보니 이번에도 부상 투혼이었다. 사실 유승은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스노보드를 그만두려 했다. 새 시즌을 앞두고 스위스에서 훈련하다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다. 발목 부상에서 어렵게 회복한 직후라서 더 힘들었다. 유승은은 “진짜 어렵게 몸 상태를 끌어올렸는데, 지금까지 한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 많이 속상했다. 처음으로 ‘스노보드를 그만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가족과 지인의 응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급히 귀국해 수술대에 올랐다. 뼈를 고정하는 핀을 손목에 삽입하는 수술을 받고 출국했다. 대회는 깁스를 착용하고 치렀다.
유승은은 “깁스가 무겁고, 부상 부위가 신경 쓰여서 100% 기량을 발휘 못 했다. 오히려 잘됐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웃었다. 유승은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처음 스노보드를 탔다. 원래는 탁구나 스케이트보드 국가대표를 꿈꿨는데, 스노보드의 매력에 빠져 진로를 틀었다.
유승은은 “탁구 선수로는 큰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실력이 좋았다”면서 “탁구를 치며 반사신경, 스케이트보드로 균형 감각을 체득한 것이 스노보드를 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왜 빅에어 종목을 선택했냐’고 묻자 그는 해맑게 웃으며 “딱 한 번의 점프로 승부하는 스포츠라는 점이 매력”이라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점프를 해 랜딩(착지)했을 때가 가장 짜릿하다”고 했다.
유승은의 꿈은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는 남은 기간 소속팀 롯데 스키앤스노보드팀의 지원 아래 경기력을 끌어올릴 예정이다. 2014년부터 대한스키·스노보드협회 회장사를 맡고 있는 롯데는 2022년에 롯데 스키앤스노보드팀을 창단해 유승은을 비롯한 유망주들이 더 좋은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유승은은 아직 공식 대회에선 선보이지 않은 필살기도 있다. 백사이드 트리플콕 1440도(뒷방향으로 점프해 공중에서 몸을 축으로 3번 뒤집고, 4바퀴 회전하는 최고 난도 기술)다. 전 세계 여자 선수를 통틀어 이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는 5명 정도다. 유승은은 “올림픽에서 쓸 수 있도록 필살기 완성도를 높일 것”이라며 “무명 선수인 내가 우승 후보를 제치는 상상을 하며 잠든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