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영하로 떨어지는 법이 없는 ‘영원한 봄의 도시’. 바로 쿤밍(昆明)이다. 중국에는 겨울이 되면 모든 거지가 윈난성(云南省)의 쿤밍으로 모인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지난달 우리 부부는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서 윈난성의 쿤밍까지 한 달간 배낭여행을 했다.
아내의 여행
윈난성에는 2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티베트 고원에 사는 장족(藏族·티베트인)은 생김새와 의복은 물론, 생활 터전도 이국적이다. 윈난성 샹그릴라(香格里拉)가 바로 장족의 땅이다. 그들의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고, 기골이 장대했다. 장족 무리를 스쳐 갈 때마다 나는 그들의 기세에 눌려 종민의 팔을 바짝 끌어당겨야 했다.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 ‘푸른 달빛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제임스 힐튼의 1933년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한 가상의 이상향 샹그릴라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요즘은 중국 젊은 세대의 인기 관광지로 통한다.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남기는 일명 ‘왕홍 체험’이 샹그릴라에서도 인기다. 왕홍(网红·인플루언서를 뜻하는 중국어)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한 이들 사이에서 칙칙한 등산복 차림의 우리는 늘 튀는 존재였다. 그들의 화려한 전통 의상과 인형처럼 뽀얀 화장법에 나 역시 시선을 빼앗겼다.
샹그릴라의 티베트 유적 두커종고성(独克宗古城)도 입구부터 ‘왕홍 스튜디오’가 빼곡했다. 왕홍 스튜디오는 의상·헤어·메이크업은 물론, 사진 촬영과 보정까지 포함한 패키지로 구성된다. 가격은 5만~20만원대로 천차만별이었다. 왕홍으로 변신한 중국 MZ세대는 티베트 사원 송찬림사(松赞林寺)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가 기념사진을 담아갔다.
종민과 나는 샹그릴라를 떠나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강물이 굽이치고, 위로는 병풍 같은 봉우리가 펼쳐진 길을 걸었다. 호랑이가 뛰놀았다는 전설을 품은 곳, 바로 호도협(虎跳峡)이다. 13개의 육중한 봉우리를 거느린 옥룡설산(玉龙雪山)이 용이 누워 있는 듯한 모양으로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길 위 숙소들 가운데서도 '차마객잔(茶马客栈)'이 가장 빼어난 풍경을 자랑했다. 해가 저물어 옥룡설산이 붉게 물들고 밤하늘엔 별이 가득 차도, 설산의 흰 봉우리만은 끝내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짐을 풀고 설산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다음 날 새벽녘 다시 길을 나섰다. 안개가 가려졌던 옥룡설산도 서서히 고개를 내밀었다. 설산의 자태가 유독 더 희고 고왔다. 그 맑은 얼굴로 내게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김은덕 [email protected]
남편의 여행
2000년대 나는 쿤밍에서 20대를 보내며 윈난성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그때 가장 좋아했던 풍경이 호도협과 리장고성(丽江古城)의 고요한 아침이었다.
리장고성은 옥룡설산 아래에 위치한 거대한 고성(면적 약 3.8㎢)으로, 윈난 소수민족 중 하나인 나시족(纳西族)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덕분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동파문(东巴文)이 나시족 문화 중 가장 눈에 띄는데, 전 세계에서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사용되는 상형문자다. 리장고성의 거리 간판에는 한자·영자·동파문자가 나란히 적혀 있어, 내가 짐작한 뜻이 맞는지 곧바로 확인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리장고성은 곳곳으로 수로가 나 있다. 옥룡설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로를 타고 골목골목을 흐르며 맑은 물빛으로 고성을 수놓는다. 나시족은 물 쓰는 규칙이 꽤 엄격한데 첫 칸에서는 몸을 닦고, 둘째 칸에서는 먹거리를 씻고, 마지막 칸에서는 빨래를 한다.
2000년대만 해도 고성의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나서면, 전통 복장을 하고 수로에서 무언가를 씻던 나시족 할머니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요즘은 어떨까.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면, 리장고성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바로 유흥의 얼굴이다. 중심가 신화지애(新华街)의 많은 식당이 밤이 되자 클럽으로 탈바꿈했다. ‘헌팅 클럽’이 고성의 밤을 가리키는 비공식 용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유리 너머의 클럽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뒤섞여 춤을 추는 모습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호객꾼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투명한 유리창 자체가 강력한 호객 수단 역할을 했다. 화려한 네온 조명 아래서 처음 만난 남녀가 즉석 만남을 하는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을 생중계로 지켜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쯤에서 정말 궁금해진다. 세계문화유산을 관리하는 이들은 리장고성의 두 얼굴에 대해 알고 있을까? 부디 이른 아침 고성의 고요함만큼은 변치 않기를 바라본다.
이번 원고를 끝으로 ‘10년째 신혼여행’ 연재를 마친다. 만 3년간 연재를 하다 보니 ‘10년째 신혼여행’이 어느덧 ‘13년째 신혼여행’이 됐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언젠가 길 위에서 만난다면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기를.
백종민 [email protected]
중국 차마고도 여행 정보
루트 : 쓰촨성 청두·어메이산·야딩~윈난성 샹그릴라·리장·쿤밍(약 1700㎞)
기간 : 28박29일(2025년 10월 24일~11월 21일)
비용 : 300만원(항공료 60만원+숙박비 60만원+경비 180만원)
여행작가 부부 김은덕, 백종민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작가 부부이자 유튜버 부부. ‘한 달에 한 도시’씩 천천히 지구를 둘러보고, 그 경험의 조각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마흔여섯 번의 한 달 살기 후 그 노하우를 담은 책 『여행 말고 한달살기』를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 『사랑한다면 왜』 『없어도 괜찮아』 『출근하지 않아도 단단한 하루를 보낸다』 등이 있다. 현재 미니멀 라이프 유튜브 ‘띵끄띵스’를 운영하며 ‘사지 않고 비우는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