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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연일 나포…서방 제재 피해 종양처럼 자란 ‘그림자 선단’

중앙일보

2025.12.23 22:49 2025.12.2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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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20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서 나포한 센추리스. 로이터=연합뉴스
“선박이 ‘대놓고 숨는(hiding in plain sight)’ 말레이시아 인근 해역으로 향했다. 대형 유조선 두 척이 서로 맞댄 채 호스로 석유를 옮기고 있었다.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았다. 위치 신호 전송장치를 껐기 때문이다. 덮개로 선박 이름도 가린 채였다. 한 척은 미국의 제재 대상 선박이었다.”

지난 8월 미국 CBS가 보도한 일명 ‘그림자 선단(shadow fleet)’에 대한 묘사다. 이란산 석유가 중국으로 비밀리에 흘러 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미국이 최근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서 나포한 유조선도 그림자 선단의 일원이다. 세계 곳곳에서 그림자 선단에 대한 경계심이 확산하고 있다.

미국 해안경비대는 지난 21일(현지시간)부터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서 파나마 국적 유조선 벨라1(Bella1)을 쫓고 있다. 제재 대상 선박으로 나포 가능성이 크다. 해안경비대는 20일엔 파나마 국적 유조선 센추리스(Centuries)를 나포했다. 백악관은 센추리스에 대해 “베네수엘라 그림자의 선단 일부로 활동하며 도난 석유를 운송한 위장 국적 선박”이라고 설명했다.

10일 나포한 유조선 스키퍼(Skipper)까지 포함하면 미국은 이달 들어 베네수엘라 관련 유조선을 3척째 나포할 확률이 높다. 스키퍼는 이란 석유를 밀수한 혐의로 미국 제재 대상에 오른 선박이다. AFP통신은 베네수엘라 정권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미국이 최근 군사 작전의 초점을 마약에서 원유 수출 차단으로 옮겼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이다. 다만 베네수엘라의 국영 석유회사 PDVSA는 미국의 제재로 글로벌 석유 거래 시장에 참여할 수 없다. 생산량 대부분을 대폭 할인한 가격에 중국 정유사에 판매한다고 AP통신은 설명했다. 그림자 선단이 베네수엘라의 경제 숨통을 틔게 하는 '구명선'인 셈이다.

그림자 선단은 이름 그대로 국적과 배의 실소유주·운영진을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인 밀수 전문 선박이다. 배의 국적을 세탁하거나, 선박 위치 추적기를 끄거나, 공해에서 석유를 맞바꾸는 수법을 쓴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피해 그림자 선단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수출의 50% 이상이 원유·가스 등 에너지인 러시아는 중국·인도 수출 물량의 상당수를 그림자 선단에 의존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러시아 그림자 선단을 제재하는 게 우크라이나 종전을 압박하는 수단이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영국도 그림자 선단을 나포하는 등 제제에 동참하고 있다. 북한 공해 일대도 그림자 선단이 암약하는 주요 해역 중 하나다. 한국도 안전지대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영국 왕립군사합동연구소(RUSI) 재정안보센터의 곤잘로 사이즈 에라우스킨 연구원은 가디언에 “그림자 선단 자체는 새로운 위협이 아니다”라면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급격히 늘어 현재 세계적으로 900~1200대를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엘리자베스 브로 선임 연구원은 “(그림자 선단이) 전 세계 유조선 비율의 20%에 가까울 정도로 종양(tumor) 같이 자랐다”고 우려했다.

마약·매춘·도박 같은 지하 경제를 뿌리 뽑기 어려운 것처럼 그림자 선단을 단속하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져서다. 영국 해운 전문지 로이즈 리스트에서 그림자 선단을 추적 보도한 토머 라난 기자는 “제재 대상국은 원유를 팔 수 있고, 선주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더 많은 이익을 거두는 등 서로 유인을 보는 한 제재를 피하는 그림자 선단이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기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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