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로 올라온 성가대원이 느닷없이 관객들에게 제안했다. 사람들이 다 함께 ‘라(A)’ 음을 내며 짧은 합창을 끝맺는 순간 공연장 전체가 암전됐다. 둔탁한 전자음만 맴도는 무대 위로 조명이 비치며 한 줄의 오선보가 바닥에 레드카펫처럼 촤르륵 깔렸다. 차례로 등장한 무용수 네 명은 오선 위에서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파트의 음표가 돼 춤을 췄다. 작곡가 김재훈이 연출한 음악극 ‘화성학 실습’의 한 장면이다.
여러 음악, 예술 장르가 융합된 창작 음악극들이 국내 무대에 연이어 오르고 있다. 국악과 서양음악, 아날로그 악기와 신디사이저, 조성과 무조 등 각기 다른 음악적 요소들이 혼재돼 있으며 무용과 연극, 미디어 아트 등 다른 예술 간 벽도 과감하게 허문다. 3040세대의 젊은 작곡가들이 이끈 변화다. 이른바 ‘뮤직 시어터’로 총칭되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극을 관객들도 주목하고 있다.
뮤직시어터는 음악을 중심에 두되 연극·무용·퍼포먼스 아트의 요소를 자유롭게 결합한 공연예술 장르로, 1960년대 독일에서 활동한 아르헨티나 출신 작곡가 마우리치오 카겔 등의 작품 이후 정착된 용어다. 이민희 평론가는 “국내에선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이후 젊은 작곡가, 연주단체들을 중심으로 뮤직시어터 형식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
현대음악 앙상블 ‘왓아이아트(WHAT WHY ART)’는 지난달 ‘인어공주’ 작품을 통해 전통음악과 현대음악, 전자음향이 뒤섞인 음악을 선보였다. 인어 역에는 전통무용가 정소연이, 왕자 역에는 마임이스트 임재헌이 등장했다.
이 같은 실험적 시도는 극 전반의 주제, 서사와도 유기적으로 결합돼있다. 김재훈 연출은 “전공자들이 알고 있는 화성학 지식을 최대한 쉽게 풀어주기 위해 무용 퍼포먼스와 미디어 아트를 활용했다”며 “작곡가의 역할도 기획, 연출로 확장된다”고 설명했다.
뮤지컬·연극 등 다른 공연 예술에 비하면 내러티브나 구성은 비교적 느슨하다. 덕분에 퍼포머들의 역할이 확대되고, 음악을 즉흥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많다. 연주단체 ‘무지카엑스마키나’가 지난달 27~28일 공연한 ‘기계장치의 음악’이 대표적이다. 3명의 퍼포머는 리코더·테오르보 같은 고악기와 모듈러 신디사이저 등 현대 전자음악 악기를 대부분 즉흥으로 연주했다. 공연 종반부엔 무대 곳곳에 놓인 확성기와 그릇 등 스스로 소리 내는 100여개의 오브제들과 연주자들의 음악이 하나의 거대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윤현종 무지카엑스마키나 대표는 “악보·대본은 따로 없으며 느슨한 형태의 구성만 연주자들과 상의한 뒤 무대에 오른다”고 말했다.
무대와 객석의 간극도 허물어진다. 앙상블 ‘팀프(TIMF)’가 지난 5일 창작공유회를 통해 공유한 ‘기술을 가진 이들의 희극’의 경우 퍼포머들은 스크린 속 영상, 무대와 막간극 공간, 객석 사이를 경계 없이 이동하며 연주와 연기를 펼친다. 의상도 정장이 아닌 청바지에 민소매 티 등으로 자유로운 복장이다. 문종인 팀프 예술감독은 “공간의 변형으로 관객 역시 연주자들이 느끼는 에너지를 그대로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같은 공간 안에서 극에 참여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실험적 시도 뒤엔 청중과 멀어진 현대음악에 대한 고찰이 있다. 익명의 한 현대음악 작곡가는 “이젠 평범한 현대음악 연주회에 가는 사람은 작곡가의 가족들이나 업계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라며 “다시 관객을 불러들이기 위한, 일종의 생존을 위한 시도들”이라고 말했다. 이민희 평론가는 “뮤직시어터 공연에 가면 기존 클래식 공연장과는 확연히 다른 관객 층을 확인할 수 있다”며 “각종 실험적인 시도들이 젊은 관객에게 힙하고 세련돼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은 이 같은 공연을 준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윤현종 대표는 “공연장 대관료, 무대나 음향 장치, 이를 다룰 스텝들의 인건비 등의 비용 단위가 꽤 큰 편”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홍보도 힘들다보니 티켓 수익을 보장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 공연은 대부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된 것이다.
창작자들의 실험적인 시도가 이어지려면 관객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나주리 동덕여대 음악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클래식 관객의 취향은 19세기 음악 연주에만 편중돼있다”며 “영국처럼 연주가 발달한 나라를 ‘음악의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듯,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려면 창작 활동이 활발해져야 하고 이에 대한 존중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