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유럽연합(EU) 간의 ‘디지털 전쟁’이 확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EU의 ‘빅테크 규제’를 주도한 전직 고위 관료 등을 입국 금지하자, 유럽의 지도자들이 24일(현지시간) “주권 침해”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이 문제 삼은 디지털서비스법(DSA)과 디지털시장법(DMA)은 한국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는 ‘온라인플랫폼법(온플법)’의 모태로 불린다. 대서양 동맹을 흔드는 디지털 전쟁의 불똥이 한국으로 튈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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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 ‘입국 금지’…디지털 규제 정조준
갈등은 전날 미 국무부가 티에리 브르통 전 EU 내수담당 집행위원을 비롯 독일과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관계자 등 5명을 비자 발급 제한 대상 명단에 올리면서 최고조로 치달았다.
동맹국 인사에 대한 이례적 입국 금지에 대해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들은 미국 온라인 플랫폼 기업을 검열하고, 수익 창출을 제한하는 등 조직적 압박을 가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브르통 전 집행위원은 2022년 EU가 제정한 디지털서비스법(DSA) 제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DSA는 플랫폼 기업이 불법 콘텐트와 혐오 발언, 허위 정보 등을 통제하지 못하면 매출의 6%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디지털시장법(DMA)은 지배적 플랫폼을 사전에 지정해 자사 상품·서비스를 우대해 끼워 팔지 못하도록 한다.
사실상 X(옛 트위터), 메타, 구글 등 미국 기업을 겨냥한 법으로, EU는 최근 X의 계정 인증 표시와 광고 정책을 문제 삼아 1억2000만 유로(약 2097억원)의 과징금을 실제로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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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정상까지 참전…“디지털 주권 위협”
유럽은 정상까지 ‘참전’하며 전면 대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브르통을 비롯한 유럽 인사 5인에 대한 조치를 규탄한다”며 “이는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약화하려는 위협이자 강요”라고 했다.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도 “DSA는 EU가 민주적으로 채택한 것”이라며 “비자 금지는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사자인 브르통 전 위원은 X에 미국의 조치를 “마녀사냥”으로 규정하며 “매카시즘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DS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유럽 의회의 90%와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법”이라고 적었다. 이어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EU는 표현의 자유, 디지털 규칙, 주권 수호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dpa통신은 다만 “EU가 미국에 맞대응을 다짐했지만 어떤 조치를 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며 “특정 분야에서 미국과 협력을 제한하거나 경제적인 대응을 선택지로 고려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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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총출동 재반격…“미국 주권 중대 침해”
유럽의 맞대응에 이번엔 트럼프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해 대응했다. 루비오 장관은 이날 “유럽의 이념주의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미국 플랫폼들이 스스로 반대하는 미국 내 관점을 처벌하도록 강요해왔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극악무도한 초국적 검열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크리스토포 랜도 국무부 부장관은 “유럽의 주권국가들이 EU가 미국의 기본적 자유를 공격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들 역시 미국이 기본적 자유를 수호해주길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개별 국가들에게 EU 차원의 대응에 동참하지 말 것을 압박했다.
툴시 개버드 미 국가정보국장(DNI)도 “미국인의 표현의 자유는 미국 헌법에 명시돼 있다”며 “미국 플랫폼에 대해 미국인의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거나 침묵하도록 하는 반자유 정책을 강요한 외국의 행위는 미국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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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60분’ 제작진 해고하라”
특히 앤드루 퍼즈더 주EU 미국대사는 “표현의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자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 요소”라며 “트럼프 행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증진하는 정책을 강력히 옹호한다”고 밝혔다. EU에 대한 강경 대응이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가 위한 목적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백악관의 실세로 불리는 스티븐 밀러 부비서실장은 이날 폭스 인터뷰에서 이민자 강제 추방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CBS를 향해 “반란에 가담한 ‘60분’ 제작자 전원을 해고하고 집안 청소를 하라”며 노골적 압박을 가했다.
CBS의 간판 프로그램 ‘60분’은 트럼프 행정부가 엘살바도르의 테러범 수용센터(CECOT)로 추방한 사람 중 절반 이상은 범죄 전력이 없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신임 편집국장은 밀러 부비서실장의 반론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송 직전 송출을 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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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전면전…“한국도 예외 아니다”
외교가에선 디지털 규제를 문제 삼는 미국의 다음 타깃이 자칫 한국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온플법이 논란이 된 EU의 법들을 기초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17일 미 하원 청문회에서는 “가장 우려해야 할 점은 EU의 DMA가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주장과 함께 “한국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고 브라질, 일본, 호주 등에서도 같은 흐름이 보인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앞서 정치전문매체 플리티코는 지난 18일로 예정됐던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가 연기된 배경에 대해 “한국이 트럼프 행정부가 차별적이라고 판단하는 디지털 제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