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쓸쓸한 결말을 맞았을까요. 유품정리사 김새별 작가가 삶과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중앙일보 유료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가 ‘어느 유품정리사의 기록’(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30)을 소개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구독 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내 절친의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는 울먹였고 나는 며칠 내내 멍했다.
충격이 컸다.
아내의 친구, 그녀의 남편. 대략 내 또래. 가정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 사경을 헤맨다. 수많은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가까운 지인의 안타까운 소식에 담담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내 모습이 오버랩돼서 그랬을까.
친구와 통화를 하며 연신 눈물을 닦아내는 아내의 모습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어깨만 두어 번 두드려줬을 뿐이다.
지인의 소식에도 이렇게 먹먹한데….
가족의 때아닌 죽음을 겪어야 하는 이들의 슬픔이란 어떨까.
얼마나 무겁고 아플까.
당사자조차 실감 못 하는 고통에 우린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그때 즈음 조카의 유품 정리를 의뢰하는 이모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는 지금 경황이 없어서요. 병원에 있어요.”
충격을 받은 엄마는 몸져누웠다.
자식의 죽음.
뭔지 모르지만 아는 느낌이었다.
사인은 아마도 그것이겠다.
‘깨끗하게 치워주겠다, 정성을 다하겠다….’
여러 말들이 떠올랐지만 이번엔 꾹 삼켰다.
“아무런 말도 못 하겠더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친구와 통화가 끝나고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내는 사실 꽤 오랜 시간 통화했다.
그런데 아무런 말을 못 했다니….
그제야 아내가 전화기를 붙들고 나눈 대화는 대부분 울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뢰인과 통화를 마치며 결국 내가 꺼낸 말이다.
영 찜찜했다.
아직도 이런 ‘응대’에 서툴다니….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작별을 앞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떠나보낸 이들에겐….
“억지로라도 먹고, 억지로라도 자야 해. 알겠지?”
그날 지인과의 통화에서 아내가 했던 말, 내가 들어 이해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문장이었다. 흐느낌과 이 말의 반복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필요하겠나.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다.
그런 말을 아내는 에둘러 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할 말이,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니까….”
조카의 유품을 부탁한 의뢰인은 ‘원룸’이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해 보니 달랐다.
오피스텔에 흔한 복층 구조였지만 오피스텔은 아니었다.
보통 외곽 주택가 골목길에 흔한 원룸 빌라도 아니었다.
외관상으로도 제법 고급진 건물이었다.
“이런 것도 원룸이라고 해요?”
“그러게, 이렇게 생긴 원룸도 다 있네. 하긴 방마다 문이 달려 룸이 나뉜 건 아니니까 원룸이 맞는 건가?”
함께 간 직원과 나는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살림살이를 보니 아주 세련됐다.
주방가구는 전부 최신식 옵션이었다.
직접 꾸민 방 구석구석도 아기자기했다.
고인으로 여겨지는 사진을 얼핏 봤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금방 발견했나 보다.”
죽음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여성의 체구도 작았던 모양이다.
집 안 겉모습만 봐도 경제적 형편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원룸이지만 고급이었다.
채워진 살림에서도 금전적 여유가 느껴졌다.
“건물에 이미 소문이 나서 집주인이 짐을 빨리 빼달라네요.”
이모인 의뢰인이 전한 사정은 그랬다.
폐기물이 아닌 진짜 유품을 포장이사 하듯 챙겨야 했다.
닫혀 있는 ‘방’은 화장실이었다.
매립식 욕조가 아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독립형 욕조.
혹시나 싶어 천장을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