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대미 여론전을 통해 ‘미국 기업에 대한 한국의 차별’ 프레임을 확산하는 기류가 포착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한·미 관계의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정부의 정교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26일 “(쿠팡 사태는)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보안 문제 대응 및 소비자 보호와 관련된 것으로, 통상 문제로 비화될 사안이 아니다”라고 언론에 배포한 별도 입장을 통해 밝혔다. 쿠팡 사태가 국내 사안임을 분명히 하며 외교·통상 리스크로의 확산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지난 25일 대통령실이 소집한 관계 장관급 회의에도 김진아 외교부 2차관과 오현주 국가안보실 3차장 등이 참석해 한·미 관계 여파를 논의했다.
실제 쿠팡 사태 대응은 개인정보 유출 수사와 민관합동 조사, 국회 연석청문회와 범부처 TF(태스크포스)를 통한 후속 조치가 병행되는 가운데 외교적 파장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보좌관은 지난 23일 X(엑스)에 “쿠팡을 겨냥한 한국 국회의 공격은 미국 기업에 대한 더 넓은 규제 장벽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진영 인사인 정치평론가 스티브 코르테스도 같은 날 X에 “한국의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공화당 중진인 대럴 아이사 하원의원도 지난 22일 보수 매체(데일리 콜러) 기고문에서 애플·구글·메타와 함께 쿠팡을 언급하며 “새로운 디지털 무역 관련 법이 한국과 중국 기업에는 유리하게 작용하는 반면 미국 기업의 한국 내 사업 활동을 옥죄고 있다”는 시각을 담았다. 미국 내에선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사안과 관련해 미국 시민권자인 김범석 쿠팡 Inc 의장을 한국 국회가 소환하려는 움직임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기류도 감지된다는 지적이다.
미국 내의 이같은 반응은 쿠팡이 ‘미국 기업’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전방위 여론전을 펼치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쿠팡은 2021년 나스닥 시장에 상장한 이후 최근까지 미국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1075만 달러(약 159억원)를 로비 자금으로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소극적 대응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미국 정치권을 통한 우회적 압박을 가하는 이중 전략을 펼치는 거란 분석이 나온다.
쿠팡이 최근 발표한 자체 조사 결과에 대한 국문과 영문 성명 간 차이는 이런 전략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국문본에서는 ‘불필요한 불안감’, ‘억울한 비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영문본에서는 이를 ‘잘못된 불안감(false insecurity)’, ‘잘못된 비난(falsely accused)’으로 옮겼다. 또 국문본에서는 ‘정부와 협력했다’고 표현한 대목을 영문본에서는 ‘정부가 쿠팡에 접촉해 전면적 협조를 요청했다’고 명시했다. 국정원의 역할까지 "정부 지시에 따른 공조"인 것처럼 구도를 짜는 쿠팡이 미국 내 여론에 '국가 권력이 과도하게 개입했다'는 식의 인상을 주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런 상황에서 쿠팡이 노리는 대로 ‘한국의 정부와 국회가 미국 기업을 공격한다’는 인상이 고착될 경우 사안이 외교 문제로 급격히 전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상대는 트럼프 행정부라는 점에서 파장은 더욱 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워싱턴에서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약 2시간 반 앞두고 “한국에서 숙청 또는 혁명(Purge or Revolution)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교회가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를 정보 당국으로부터 들었다”고 직접 거론했다. 이와 관련, 한국 내 특검 수사 상황이 일부 맥락만 부각된 채 종교 네트워크 등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귀에까지 닿았다는 분석이 외교가에서 나왔다.
이 같은 전례 탓에 통일교 수사 국면에서도 정부의 대미 외교 라인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외교 소식통은 “종교 문제나 쿠팡처럼 미국 정·재계와 긴밀히 연결된 사안은 자칫 트럼프 행정부에 불필요한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세심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성향과는 별개로 워싱턴 조야에 한국의 디지털·플랫폼 규제가 불합리하며, 미국 기업을 차별한다는 인식이 이미 상당 기간 누적됐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공동 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에는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서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로서는 쿠팡의 노림수에 말려드는 듯한 감정적이거나 강경한 대응도, 국내 여론과는 배치되는 과도한 저자세도 모두 부담인 셈이다. 자칫 오해의 불씨가 커지기 전에 한·미 간 소통 채널을 통해 미국 측이 수긍할 수 있는 선제적 설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