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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횡포에 "둘 다 못 믿겠다"…유럽, 전시수준 재무장 속도전 [글로벌리포트]

중앙일보

2025.12.2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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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독일 연방의회 예산위원회는 500억 유로(약 85조원)가 넘는 국방 조달 계약을 한꺼번에 승인했다. 군복·보병전투차량·정찰·감시 위성 체계 등 개인 장구류부터 첨단장비까지 싹 갈아엎겠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독일군 역사상 최대 규모 방위비 투자”라고 평가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왼쪽)가 17일(현지시간) 독일 연방의회에서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해당 승인을 놓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 군사전문가를 인용해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를 공격할 수 있는 2029년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확보하는 게 독일 조달 정책의 핵심”이라고 전했다. 독일은 2025~2030년 국방비로 직전 5년의 두 배 수준인 6500억 유로(약 1105조원)를 지출할 계획이다.

이 장면은 ‘유럽의 각성’을 상징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평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경고가 커지며 유럽 각국의 재무장에 속도가 붙었다. 러시아의 서진(西進) 가능성, 트럼프 체제의 미국이 유럽 편에 서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불을 지폈다. 다만 우크라 지원의 비용·위험 분담을 두고 각국의 동상이몽도 드러났다.

독일산 장거리 공대지 순항미사일 타우러스. 독일 연방의회는 17일(현지시간) 타우러스 미사일 개량을 포함, 500억 유로가 넘는 대규모 국방 조약 계약을 승인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 ‘서진’ 공포…드론·파괴공작이 일상

위기감은 지도자들의 말에서 포착된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11일 “분쟁이 문 앞에 와 있다”며 “조부모·증조부모 세대가 감내한 규모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13일 집권당 행사에서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푸틴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1938년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점령을 거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이 국민에게 전쟁 대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정리했다.

위기감은 현실에서 더욱 커졌다. 지난 9월 10일 러시아 드론의 19건에 달하는 영공 침범에 폴란드는 F-16과 함께 나토, 네덜란드로부터 F-35, 이탈리아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독일 패트리엇 지원을 받아 3~4대를 격추했다. 나토 전력이 1949년 나토 출범 이후 회원국 영공에서 실사격으로 첫 대응한 사례였다. 이후 루마니아 등에서도 러시아 드론으로 추정되는 비행체가 잇따라 포착됐다.
폴란드군이 지난 9월 10일 폴란드 루블린주에서 격추된 러시아 드론과 파손된 주택을 수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이 자동 개입 안 할 수도”…깊어진 대미 불신

휴전 이후 러시아가 총구를 유럽으로 돌릴 때 미국이 ‘자동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도 유럽의 자구책을 재촉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평화안 초안을 두고 “독일 메르츠 총리가 미국 측 설명이 아닌, 언론 헤드라인으로 (평화안 내용을) 처음 알았다”고 전했다. 유럽 외교 당국자들은 평화안에 영토 획정·제재 해제에서 러시아 입장이 과도하게 반영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유럽이 사실상 배제됐다”는 게 NYT의 평가였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의 발언에서도 유럽이 우선순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방어하지 않겠다”고 했고, 앞서 2월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도 “유럽 방위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복무 부활, 군비 확대...EU의 각성

각성은 제도화로 이어졌다. EU 이사회는 5월 ‘유럽안보행동(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을 채택해 최대 1500억 유로(255조원)를 회원국에 장기·저금리 대출로 제공하기로 했다. 공동조달로 방산 기반을 키우고 방공망·드론·탄약 등 전력 공백을 메우자는 취지다. 9월엔 영국·프랑스가 공동 의장국을 맡은 ‘의지의 연합’을 띄워 26개국이 종전 이후 우크라 안전보장 구상을 논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11월 27일 프랑스 알프스 지역 바르스 기지에서 새 군복무 제도를 공개하는 연설에 앞서 사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병력 보강도 시작됐다. 독일은 5일 새 군 복무 법안을 통과시켜 자원입대를 원칙으로 하되 부족 시 징집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었다. 프랑스도 “가속화되는 위협”을 들며 18~19세 대상 10개월 유급 자원복무를 2026년 중반부터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군비 지출은 빠르게 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4년 유럽 군사비 지출이 전년 대비 17% 증가했다고 집계했다. 독일 국방비는 GDP 대비 2024년 2%선으로 올라섰고, 올해 2.35%까지 상승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폴란드는 지난해 3.79%에서 올해 4% 진입이 유력하다. 유럽방위청(EDA)은 EU 회원국의 2024년 국방비를 3260억 유로(554조2000억원)로 추정하며 2021년 대비 30% 늘었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2038년 전력화를 목표로 약 102억5000만 유로(17조4000억원)를 투입해 차세대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을 건조하기로 확정했다.

프랑스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샤를드골함이 지중해에서 항해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샤를드골함을 대체할 차세대 항공모함 건조를 공식 승인했다. 신형 항모는 2038년 취역할 예정이다. AFP=연합뉴스


우크라 지원엔 이해관계 엇갈려

우크라이나 지원도 제도화가 진전됐다. EU는 19일 정상회의에서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900억 유로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WSJ는 “대출이 없으면 우크라이나는 내년 봄 자금이 고갈될 것”이라며 트럼프가 미 재정지원을 거의 중단한 상황에서 유럽 결정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15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의 영접을 받고 있다. 이날 베를린에는 유럽 지도자들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이 모여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방안을 논의했다. AFP=연합뉴스
다만 유럽이 동결한 러시아 자산 2100억 유로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선 결론을 내지 못했다. 러시아의 보복과 소송 위험을 두고 이해관계가 갈린 탓이다. FT는 동결자산 활용에 독일은 적극적이지만 프랑스가 제동을 건 ‘역할 역전’을 짚었다. 숄츠 시절 연정 균열로 우크라 문제에 기권이 잦았던 독일이 메르츠 체제에선 유럽 맹주 역할을 강조하며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 지원에 적극적이던 프랑스는 자산을 단기간 내 반환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공공부채가 큰 프랑스로선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물밑에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유럽 내 러시아 자산의 3분의 2를 갖고 있는 예탹기관 유로클리어 소재국 벨기에도 러시아의 보복을 우려했다. 막심 프레보 벨기에 외무장관은 “돈은 쓰면서 위험은 우리에게만 떠넘기는 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WSJ는 “각국 지도자의 국내 정치·재정 압박이 엇갈린다”며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의 말을 인용해 “전쟁 피로감과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이 바로 푸틴이 원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근평([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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