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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시선] 이재명 정부의 '달러 모으기', 의지와 능력 사이

중앙일보

2025.12.2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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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 논설위원
‘금 모으기 운동’의 기억은 강렬하다. 실제 효용성에 대한 의견은 엇갈리지만 외환 위기란 수렁에서 나라를 건져낸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금 모으기’를 외환 부족 사태의 손쉬운 해결책으로 떠올리게 된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이 아니라 달러다. 고삐 풀린 환율을 잡겠다는 정부는 ‘달러 모으기 운동’ 중이다.

정부의 기세는 자못 결연하다. 정책 당국자는 환율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정책 실행 능력을 곧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의지와 능력은 정책의 성공에 필수 조건이다. 그렇지만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건 둘 사이의 균형이다.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정책의 첫 단추조차 끼울 수 없다. 반면 능력 없이 의지만 불타서는 일을 그르치거나 각종 부작용과 문제만 야기할 수 있다.

치솟는 환율을 잡으려는 정부의 의지는 그야말로 활활 타오른다. 졸지에 ‘해외 투자 전사’란 꼬리표를 달게 된 서학 개미에 으름장을 놓고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18일 수출 기업을 불러 모아 “작은 이익을 보려 하지 말라”며 달러를 팔라는 압박을 서슴지 않았다. 증권사의 해외 주식 마케팅을 막고 자산운용사의 노헤지 상품 판매를 질책하는 건 애교 수준이다.

달러 수집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환율 방어의 선봉장에 세웠다. 650억 달러 규모의 한국은행-국민연금 외환스와프와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 헤지’(환율이 미리 설정한 기준을 넘을 경우 해외 자산을 매도해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것) 기간을 내년까지 연장했다. 금융기관이 한국은행에 맡긴 외화예금 초과지급준비금에는 6개월간 이자를 주기로 했다. 낮은 이자 때문에 금융사가 외화자금을 해외에서 굴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달러 빚도 불사한다. 달러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외화 부채를 보유할 때 내야 하는 부담금(외환건전성 부담금)을 한시적으로 면제하기로 했다. 심지어 국민연금의 외화채 발행까지 검토하고 있다.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달러로 해외 자산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해외 투자를 위한 달러 수요가 줄면서 원화 약세 압력을 낮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치솟는 환율 잡으려 전방위 대책
의지만 앞서며 부작용 낳을 수도
한국 경제 신뢰 회복 조치가 필수

세금 혜택이란 승부수도 던졌다.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로 달러를 손에 쥔 서학 개미의 ‘귀순’ 길을 열었다. 내년 한 해 동안 해외 주식을 팔고 그만큼 국내 주식에 1년 이상 장기투자하면 5000만원 한도로 해외 주식 양도소득세(22%)를 깎아주겠다는 것이다. 기업에는 해외 자회사에서 받은 배당금을 국내로 들여올 때 내는 세금을 면제해주기로 했다.

정부가 쏟아낸 달러 모으기 전방위 대책이 통했는지 우상향을 그리던 원-달러 환율은 급락했다. 지난 23일 1483.6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정부가 RIA 등 각종 달러 환류책을 발표한 지난 24일 1449.9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6일에는 1445.3원까지 떨어졌다. 2거래일간의 낙폭만 43.3원에 이른다.

이 아찔한 환율의 하락 곡선이 정부가 공언한 정책 실행 능력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선 원-달러 환율이 33.7원 하락한 지난 24일 하루에만 외환 시장에 20억~50억 달러가 쏟아졌다고 추정하며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 헤지가 가동됐다고 판단한다. 국민연금을 환율 소방수로 투입해 이렇게 낮춰 놓은 환율이 다시 치솟는다면 국민의 노후 자금을 허공에 태워버린 셈이 될 수도 있다.

RIA도 구멍투성이다. 미국 주식을 처분해 RIA로 국내 주식에 투자해 양도세 감면 혜택을 챙기고 기존 주식 계좌에서 국내 주식을 팔고 해외 주식을 사들여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귀순 개미’에게 혜택을 주려 나라 곳간에 구멍만 내는 꼴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미장(미국 증시)에 투자하면 세금을 내고, 국장(국내 증시)에 투자하면 원금을 낸다”는 비아냥이 나올 만큼 국내 증시로 전향을 꾀할 유인은 여전히 약하다. 의지만 앞서는 정책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금 모으기 운동’처럼 애국심에 호소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당시 국민은 헐값에 금을 넘겼고 이익을 챙긴 건 외환위기 주범인 기업이었다는 학습 효과도 국민을 주저하게 한다. 원화의 과도한 약세를 막겠다는 정부에 시장과 국민이 기대하는 건 ‘달러 모으기 운동’ 같은 단기 처방이나 미봉책이 아니다. 기업과 개인투자자 등 수익을 좇는 경제 주체를 돌려세울 수 있는 건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한 정책과 이를 실현해 내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다.



하현옥([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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