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2025년과 오는 2026년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저무는 2025년에 역사적 갈림길을 이뤘던 사건들은 여럿이다.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를 인용했고, 6월 4일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10월 29일 한·미 관세협상을 타결했고, 10월 3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제 동지 이후 한 뼘씩 늘어나는 낮의 길이가 새로운 2026년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
‘혁신하는 선도국가’ 추진하고
‘민주주의의 민주화’ 모색하며
‘국익 중심 대외정책’ 추구해야
돌아보면 2025년을 이끈 시대정신은 ‘회복과 정상화’였다. 회복과 정상화는 두 얼굴의 명암을 드러냈다. 시대 역행적 계엄에서 민주적 정치 질서를 복구하고, 잇단 정상회담들을 통해 안정적인 외교를 복원한 것은 대한민국의 역량을 증거한 성과였다. 동시에 공고화된 정치 양극화, 강화된 자산 양극화, 여전한 인구 위기와 지방 소멸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증거한 한계였다.
시대정신이란 말에 담긴 질문은 둘이다. 하나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면,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을 숙고하고, 그 조건 아래 최선의 전략적 선택을 모색해야 한다. 올바른 시대정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대 진단이 요구되고, 이에 기반해 실현 가능한 국가전략을 도출해야 한다.
21세기의 두 번째 25년에 들어서는 2026년, 지구적 차원의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국면사(局面史)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저성장의 지속과 뉴노멀의 일상화, 미·중 경제전쟁의 개막과 신냉전 질서의 도래, 인공지능(AI) 혁명의 진행과 산업구조의 대변동, 포퓰리즘의 발흥과 민주주의의 위기, 불평등의 구조화와 사회갈등의 증대, 정보사회의 진전과 탈진실 시대의 전개, 지구적 인구 증가와 100세 시대의 시작, 기후위기의 심화와 지구 민주주의의 요청, 코로나19 팬데믹의 발생과 지구적 위험의 증가, 문화적 개인주의와 부족주의의 동시 강화가 이 국면사의 특징을 이뤄왔다.
2026년에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유무역과 탈냉전을 대신한 신보호주의와 신냉전이 공고해지고, ‘전쟁과 평화의 공존 시대’가 강화될 것이다. ‘엘리트 대 국민’의 이분법으로 무장한 21세기 포퓰리즘이 좌·우파 극단주의와 결합해 다원적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민주주의 위기 시대’ 역시 지속될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시대 규정 아래 AI·플랫폼·집단지성이 결합해 추동하는 ‘끝없는 변화’는 우리 인류를 ‘익숙한 것들과의 종언’이라는 신문명 시대로 더욱 깊숙이 인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2026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 번째는 ‘혁신하는 선도국가’다. 산업국가와 민주국가의 성취를 기반으로 이제는 혁신성장을 속도감 있게 추구하는 ‘K이니셔티브 국가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AI·바이오·에너지 등 신성장 산업의 로드맵과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제조업 혁신의 액션플랜을 제시하고 실행해야 하며, 이를 위한 금융·노동·교육·규제 등 구조개혁을 포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국면사의 교훈은 새로운 성장 없이 새로운 분배 없다는 점이다. 탈이념적 혁신 경쟁과 본격화한 AI 시대가 지구적인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을 이룬다면, 이러한 구속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새로운 경제성장과 새로운 사회계약 간의 생산적인 결합을 모색해야 한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한 이유는 상대방을 혐오하고 악마화하는 21세기 포퓰리즘에 있다. 포퓰리즘은 사회를 ‘두 국민 국가’로 분단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한 국민통합 자원을 고갈시킨다. 민주화 시대 40년에 다가서는 현재,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제도와 문화를 민주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제도 개혁으로서의 87년 헌법 개정과 문화 혁신으로서의 다원적 공론장 구축 및 민주시민 교육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세 번째는 ‘국익 중심의 대외정책’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질서는 앞서 말했듯 탈냉전에서 신냉전으로 변화해 왔다. 신냉전 시대는 ‘각국도생(各國圖生) 시대’에 다름 아니다. 이런 지구적 변동에 대응해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실용 외교를 추진하고, 한반도 평화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대북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나아가, K컬처가 ‘문화적 선도국가’의 위상을 높여 왔듯, 평화와 공동 번영의 지구적 의제를 선도하는 전략적 행위자로 거듭나야 한다.
당장 2026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를 생각하면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나의 희망이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전진과 후퇴의 갈림길에서 우리 사회와 우리 정치는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해 왔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2026년이 ‘혁신하는 선도국가’로 가는 원년이 될 수 있길 나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