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직선 궤적의 배구공이 코트 위를 갈랐다. 네트 너머 상대 팀 블로커들은 갈피를 못 잡고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공은 동료 공격수가 받아먹기 좋은 타점에, 마치 택배처럼 정확히 배달되기도 했다. 지난 2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카드와의 2025~26시즌 프로배구 V리그 경기. 나이를 잊은 맹활약으로 소속팀 대한항공에 세트스코어 3-1 승리를 안긴 직후에도 ‘코트의 사령관’ 한선수(40·사진)는 담담했다.
한선수는 한국 남자배구의 명실상부한 ‘리빙 레전드’지만 시작은 다소 초라했다. 1985년생 동기 중에 스타 플레이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 후 프로(당시 실업)에 직행한 박철우(우리카드 코치), 2007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 김요한(은퇴), 세터 중 1번 픽(전체 2순위) 유광우(대한항공) 등이 먼저 주목 받았다. 그가 세터로 나선 한양대는 유광우가 키를 잡고 김요한이 해결하던 인하대에 늘 밀렸다. 때문에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2순위(전체 6순위)로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데뷔 직후엔 그의 토스워크에 “단조롭다” “투박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빠른 발과 높은 배구 지능에 끊임없는 노력을 더해 자신만의 공격적 토스워크를 완성하며 차츰 존재감을 키웠다. 대한항공 원클럽맨으로 18번째 시즌을 소화 중인 그는 지난달 21일 개인 통산 2만 세트 성공이라는 신기원을 이뤘다. 남녀 통틀어 최초다. 이어 지난 28일에는 세터 최초로 통산 500블로킹을 달성했다. 높이와 수비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육각형’ 선수다.
2025~26시즌 개막 전까지는 대한항공-현대캐피탈의 ‘양강 체제’가 지배적 전망이었다. 뚜껑을 여니 대한항공의 독주다. 시즌 반환점을 1경기 남겨둔 가운데 대한항공은 14승3패, 승점 40으로 2위 현대캐피탈(10승7패, 승점 32)에 한참 앞서 있다. 최근 아웃사이드 히터 정지석에 이어 대체재 임재영까지 연거푸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해 플랜B, 플랜C까지 동원 중인데도 고공비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는 헤난 달 조토(65·브라질) 감독이 설계한 시스템 배구와 이를 코트에서 구현하는 한선수의 공이다. 디테일을 강조하는 헤난 감독은 부임 이후 강한 체력과 템포 빠른 배구를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정지석 등 공격형 아웃사이드 히터들이 줄 부상으로 빠지자 한선수는 김규민 등 미들 블로커를 적극 활용하는 속공의 비중을 높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2단 공격을 직접 수행하기도 한다. 헤난 감독이 한선수에 대해 “메커니즘을 정확히 아는 선수” “감독의 계획을 곧바로 구현한다”고 칭찬하는 이유다.
지난 16일은 한선수의 마흔 살 생일이었다. 그는 남자부 최고참 선수다. 30대 중반만 돼도 체력 훈련 등의 강도를 조절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다르다. 조카뻘 후배와 똑같은 강도와 빈도로 훈련을 소화한다. 그는 “나이 들어 힘들다는 핑계를 대기 시작할 때가 은퇴할 때”라거나 “훈련을 거르면 그게 습관이 된다” “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몸을 만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올해 목표는 물론 팀의 통합(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우승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극마크를 향한 열망 또한 여전하다. 2026년에는 네이션스컵, 아시아선수권,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가 즐비하다. 아시아선수권은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한다. 아시안게임엔 네 차례나 출전했지만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 했다. 은메달 1개(2018년)와 동메달 2개(2010, 14년)가 전부다.
40대에 접어든 이후에도 변함 없이 국가대표에 도전하는 그는 “결국 나이보다 코트 위에서 누가 더 팀에 기여하고 경기를 잘 하는지가 본질”이라며 “대표팀은 불러준다면 늘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