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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영의 마켓 나우] 퇴직연금, ‘인출 설계’ 정책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2025.12.29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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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이사·경영학(연금금융) 박사
퇴직연금의 목적은 분명하다. 은퇴 이후 월급이 사라진 자리를 채울 안정적인 소득원이다. 현실은 다르다. 적립 단계에서 중도인출로 빠져나가고, 은퇴 이후에는 일시금으로 소진된다.

국가데이터포털에 따르면 2024년 말 퇴직연금 중도인출자는 6만7000명으로 전년보다 4.3%포인트 늘었다. 인출 사유는 주택 구매가 56.5%, 주거 임차가 25.5%였다. 특히 30~40대의 중도인출 증가가 두드러졌다. 퇴직연금이 노후 소득원이 아니라 주거 자금의 보조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은퇴 이후도 다르지 않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55세 이상 퇴직자가 퇴직금을 받을 때 연금으로 수령한 비율은 13%에 그친다. 나머지 87%는 일시금이다. 이름은 퇴직연금이지만 실제 모습은 ‘퇴직 일시금’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2026년부터 퇴직연금 세제 혜택이 한층 강화된다. 퇴직금을 연금으로 나눠 받을 때 적용되는 퇴직소득세 할인율이 20년 초과 구간에서 50%로 확대된다. 기존에는 10년 이하 30%, 10년 초과 40%였다. 예컨대 20년 근속자가 퇴직금 3억원을 일시금으로 받으면 약 2000만원의 세금을 내지만, 20년 넘게 나눠 받으면 1000만원으로 줄어든다. 장기 분할 수령의 유인을 키운 셈이다

하지만 세제 혜택만으로 퇴직연금이 노후 소득의 역할을 회복하긴 어렵다. 은퇴 이후에는 장수, 유동성 부족, 인플레이션이라는 ‘노후 3대 재무 리스크’가 동시에 작동한다. 인출 전략은 이 리스크를 전제로 설계돼야 한다.

주요국들은 이미 인출 단계의 구조 설계에 나섰다. 영국은 은퇴자에게 자유로운 인출을 허용했다가 자산 고갈 문제가 드러나자 ‘투자 경로(Investment Pathways)’ 제도를 도입했다. 은퇴자의 자금 사용 목적에 따라 표준화된 인출·투자 전략을 기본값으로 제시한다. 네덜란드는 집단적 위험 공유 구조를 통해 인출 단계에서도 소득의 안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했다.

우리나라는 1964~1974년생 2차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인 은퇴기에 접어들고 있다. 퇴직연금 인출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제도는 여전히 적립 단계에 머물러 있다. 개인형퇴직연금(IRP)은 부분 인출이 제한돼 계좌를 해지해 일시금으로 받거나, 전액을 연금으로 전환하는 선택지만 허용된다. 다양한 노후 수요를 담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된 구조다.

퇴직연금이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 소득의 한 축이 되려면 인출 단계의 설계가 필요하다. 세제 혜택에 더해, 생애 후반의 위험을 고려한 인출 방식과 인출 전용 상품이 뒷받침돼야 한다. 퇴직연금의 성패는 이제 ‘얼마를 모았는가’보다 ‘어떻게 꺼내 쓰는가’에 달려 있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이사·경영학(연금금융)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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