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337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발표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쿠팡을 둘러싼 논란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1인당 5만원의 이용권을 지급한다는 보상안도 내놨지만 부정적인 여론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쿠팡과 동종 업계인 유통·이커머스 업계에서 조차 공공연히 쿠팡을 가리켜 “왜 일처리를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가장 큰 원인으로는 쿠팡의 미국식 조직문화가 꼽힌다. 쿠팡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쿠팡 경영진이 판단을 내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 증시다. 쿠팡은 매출의 90% 이상이 한국에서 발생하지만,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는 점에서 ‘미국 기업’이다. 익명을 요구한 쿠팡 관계자는 “쿠팡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미국 투자자로, 이번 사태 이후에도 주가 하락을 가장 걱정했다”며 “중요도를 따지자면 1순위는 미국 증시, 2위가 고객 이탈”이라고 전했다.
실제 현재 쿠팡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도 미국 투자자(주주)의 움직임이다. 일부 주주가 “쿠팡이 정보 유출 사고를 당한 사실을 인지하고도 관련 보고 규정에 따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보고서를 통해 공시하지 않았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어서다. 예컨대 미국 3대 이동통신사 중 하나인 T모바일은 2021년 고객 7660만 명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고로 1인당 최대 2만5000달러(약 3600만원)를 보상했다.
쿠팡 모회사 쿠팡Inc 경영진의 절반 이상이 미국인인 점도 논란을 키운 이유로 꼽힌다. 김 의장은 7세 이후 미국에서 산 한국계 미국인이고 부인도 대만계 미국인이다. 한국 쿠팡 임시대표인 해럴드 로저스를 비롯해 거랍 아난드 최고재무책임자(CFO), 브렛 매티스 최고정보보호책임자(CISO), 조나단 리 최고회계책임자(CAO) 등 주요 경영진이 모두 미국인이다. 한 쿠팡 관계자는 “발로 뛰어야 하는 영업·대관·홍보 외에 경영진은 대부분 외국인”이라며 “한국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니 논란이 커지는 배경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법적으로 문제없는데 왜?’라며 납득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대응 방식도 철저히 미국 기업을 벤치마킹한다. 쿠팡 경영진이 이번 유출 사태가 터진 후 가장 먼저 내린 지시도 ‘미국 상장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례’를 찾는 일이었다. 쿠팡의 일부 한국인 임원은 지난 4월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 당시 최태원 SK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한 사례를 들며 김 의장에게 빠르게 사과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인 경영진은 “미국에서 개인정보 유출됐다고 (CEO가 아닌) 오너가 사과하는 사례는 없다”며 조사에 집중해 사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쿠팡은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주재의 범부처 태스크포스(TF)가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려 조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자체 조사에 나섰고, 일방적으로 조사 결과를 발표해 정부와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쿠팡 고위 관계자는 “정부 측에 중간중간 결과를 발표해 가며 조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고객들을 안심시키려면 하루빨리 (또 다른 유출이 없었다고) 발표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강행한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