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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금정책 바꾸면 유산기부 문화 확 바뀐다

중앙일보

2025.12.30 07:14 2025.12.3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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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한국세법학회 회장·서울시립대 대외협력 부총장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데, 막상 유언장을 쓰려니 막막하네요.” 은퇴를 앞둔 지인이 털어놓은 고민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만 물려주기보다는 일부라도 의미 있는 곳에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걸림돌이 많아 말처럼 쉽지 않다. 고율의 상속세도 부담스러운데 기부까지 하면 가족에게 돌아갈 몫이 너무 줄어들 것 같고, 무엇보다 기부해도 세금 혜택이 별로 없다는 말에 지인은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여유가 있다면 기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상속 시점이 되면 대부분 가족에게만 재산을 물려준다. 왜 그럴까. 기부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관련 제도가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재산 10% 기부 시 세금 감면
유산기부 문화 빠르게 자리 잡아
‘산출 세액의 10% 감면’ 도입 필요

한국에는 ‘1% 나눔운동’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2011년 포스코 부장급 이상이 소득의 1%를 이웃과 나누면서 시작한 이 운동은 큰 공감을 얻으며 한국사회에 기부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그런데 평소에는 소득의 1%를 나누면서 정작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영국은 이 문제를 제도로 풀었다. 2012년에 도입한 ‘레거시 텐(Legacy 10)’ 이다. 상속 재산의 10% 이상을 기부하면 나머지 재산의 상속세율을 40%에서 36%로 낮춰준다. 영국의 상속세율은 40% 하나로 단순하다. 반면 한국은 10%부터 50%까지 5단계 세율 구조여서 영국처럼 세율을 일률적으로 낮추기보다는 ‘산출세액의 10%를 감면’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영국에서 시도한 작은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다. 변호사들은 유언장 작성 상담을 할 때 “재산의 10% 정도를 기부하면 세금도 줄어든다”고 안내한다. 의뢰인들은 “그러면 10%는 기부하는 것이 합리적이겠네”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제도 도입 이후 영국의 유산기부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제 영국에서는 재산을 물려줄 때 가족에게 90%, 사회에 10%를 기부하는 것이 상식이 됐다. 마치 한국의 1% 나눔운동이 생전의 나눔을 이끌었던 것처럼 영국의 10% 유산기부는 생애 마지막 나눔 문화를 만든 셈이다.

한국은 상속세율이 최고 50%로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정작 유산기부는 아직 미미하다. 기부하면 그만큼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해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동기를 유발하지 못한다. 예컨대 20억원을 가족에게 상속할 경우 2억원을 기부하면 18억원에 대해 상속세를 낸다. 하지만 어차피 높은 세율로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만약 “2억원을 기부하면 나머지 18억원에 대한 상속세액을 10% 깎아준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계산이 달라진다. 세금도 줄이고 선한 기부도 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일석이조다.

한국자선단체협의회가 한국갤럽에 의뢰한 ‘2025 유산기부 인식 조사’에 따르면 상속세 감면을 포함한 유산기부 관련 법이 제정될 경우 기부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가 53.3%나 됐다. 제도적 유인 없이 기부 의향이 있다고 답한 비율(29%)보다 높았다. 마음은 있는데 제도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론 부자들 세금 깎아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 쓰는 것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기부해 공익 단체들이 쓰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영국의 경우 세수는 조금 줄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자선단체로 흘러들어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고 있다. 다행히 최근 국회에서 제도 개선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공익법인 관리도 투명해지고 있다.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생전에는 소득의 1%를, 인생의 마지막에는 재산의 10%를 나누는 방향으로 새로운 나눔 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여유가 생기면 기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앞으로는 “유언장에 10%는 사회환원 조항을 넣어야겠다”는 구체적 계획으로 바뀌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험처럼 좋은 제도는 선한 마음을 행동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1% 나눔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도 10% 유산기부의 새로운 장을 열면 좋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훈 한국세법학회 회장·서울시립대 대외협력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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