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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보니 알겠어요, 살아가는 법”...이 시인이 전하는 ‘생존술’

중앙일보

2025.12.3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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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싶은 현대인들이 많지 않을까요." 나하늘 시인은 '사라지기 연작'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드러나기를 거부한 현대적 자아의 생존술”
심사위원 이수명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11월 발표된 제4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나하늘(33) 시인을 선정하면서다. 한 달 후인 지난 16일, 수상작 51편이 그대로 실린 나 시인의 첫 시집 『회신 지연』(민음사)이 출간됐다.

시집은 그야말로 ‘생존술’ 도감이다. 시인은 살아있기 위해, 사라지거나 작아지는 법을 탐구한다. 표제작 ‘회신 지연’은 이런 문장으로 맺어진다. “지금 답장할 수 없다는 말은/쉬이 용서받기 어려운데//그러나/도저히 열어 볼 수 없었다고/그게/내가 살아 있다는 뜻이라고” 화자는 누군가의 부름에 답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나하늘 시인의 첫 시집 『회신 지연』. 사진 민음사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나하늘 시인은 “이수명 시인이 ‘생존술’이라고 표현해주셔서 정말 놀랐다”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에게 시를 매개로 정확히 이해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어릴 때부터 무언갈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감각을 느꼈다. 시를 쓸 때는 같은 언어를 재료로 하는데도 해방감이 들었다”며 시를 쓴 계기를 밝혔다.

예술고등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한 시인은 서강대에서 국문학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았다. 2017년 독립문예지 『베개』의 창간 멤버로 활동했고, 독립출판물 『Liebe』(리베·2023), 『은신술』(2024)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시집을 내고자 약 2년간 원고를 준비했다.
나하늘 시인이 만든 독립출판물 『Liebe』(2023). '리베'라고 읽는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쓴 뒤, 문장부호만 남긴 채 모두 지운 '낭독으로만 존재하는 책'이다. 사진 나하늘
『회신 지연』엔 8년 전 쓴 시도 실렸다. 시집이 시인의 ‘회신 지연’된 메시지로도 볼 수 있는 이유다. 시 속 ‘은신술’ ‘생존술’ ‘생명 연장술’ 등의 표현은 시인이 겪은 우울감과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서술이다. “사라지고 싶은 현대인은 저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도 그 주제가 중요했어요. 환상을 가미해서 쓴 이유는 무거운 이야기가 가볍게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저에게도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해서에요.”

시 속 화자들은 결국 삶을 이어간다. 시인은 “기후위기를 겪는 지금의 청년·청소년들에게 삶이라는 건 굉장히 불안정하고, 길게 느껴지지 않는 개념”이라며 “그럼에도 결국 밤톨만한 희망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 말했다. “‘부상’이라는 시에 완전히 삶이 무너진 화자가 등장하는데, 언니라는 큰 사랑 때문에 다음 계절이 오기를 기다리거든요. 그런 게 삶 아닐까요.”

‘사라지기 연작(連作)’ 중 하나인 ‘사라지기 2’라는 시엔 “어려서부터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난 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인은 “친언니는 시를 가장 먼저 읽어준 첫 번째 독자이고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지지해주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언니의 응원 덕에 시인은 사라지기 위해 베를린으로 훌쩍 떠날 수 있었고, “거기서 내가 다른 나라에 있기를 원한 게 아니라 여기 없기만을 원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사라지기 1’ 일부)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세계에 접촉하고, 무언가 충돌하고...그 경험 후에 이전과 달라지잖아요. 그런게 시이고 삶이지 않을까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생존’ ‘삶’ 등 심오한 얘기를 다루지만, 시집은 가뿐히 읽힌다. 괄호를 써서 궁금증을 일으키고, 독자에게 문제를 내는 ‘문제 연작’ ‘초성 연작’도 있다. 자유롭게 언어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시인의 재치가 주제의 무게를 덜어낸다. 이런 시를 쓴 이유에 대해 그는 “시는 독자를 구체적으로 참여시키지 않더라도 이미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시인에게 지금 괄호 속에 넣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자 “나하늘”이라고 답했다. “지난 1년간 작아지기와 사라지기를 실천하면서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만났거든요. 수상 이후에 사람들 앞에 갑자기 불려 나온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괄호는 한글에서 덜 중요하거나 맥락에서 벗어나 있을 때 쓰는 문장부호잖아요. 가끔은 괄호 속 글은 뛰어넘고 읽기도 하고요. 근데 그 문장들이 가끔 흥미롭고 매력적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를 괄호에 넣고 싶어요.”

앞으로의 목표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를 위해 여느 때와 같이 ‘사라지는’ 방식을 택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지우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어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성실히 연대하고 쓰는 창작자가 되고 싶습니다. 시는 물론이고, (전처럼) 책을 만들거나 전시·퍼포먼스를 하게 될 수도 있겠죠.”



최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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