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년여 전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오픈AI가 챗GPT라는 인공지능(AI) 챗봇을 소개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하나도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AI 개념은 이미 1956년에 제안됐다. 하지만 그 후 AI의 역사는 실패의 반복이었다. ‘터미네이터’나 ‘HAL 9000’ 같은 AI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허무맹랑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챗GPT와 첫 대화를 나누는 순간, 우리 모두가 생각했다. AI가 드디어 가능해졌구나! 오로지 인간만 지능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 사유하고 판단하던 시대는 이제 끝나겠구나! ‘지혜로운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를 넘어 어쩌면 ‘지혜로운 기계’ 마키나 사피엔스(Machina Sapiens)의 시대가 열릴 수도 있겠구나!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수십 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대도 있지만, 가끔은 몇 주 만에 수십 년치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챗GPT 이후 3년 동안 우리는 수십 년치의 변화를 경험했다.
우리는 어느새 AI에 질문하고, 화내고, 위로받고 있다. 연인들끼리 휴대전화 대화 내용은 공유해도 챗GPT와의 대화 기록은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멋진 그림과 영상을 만들 수 있다. 네덜란드 스타트업이 만든 AI 여배우 틸리 노르우드는 할리우드 배우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와 중국 딥시크는 국제 수학올림피아드 금메달급 문제들을 풀어내고 있다.
이런 AI 기술의 발전은 대부분 2017년 구글이 개발한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다. 트랜스포머는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알고리즘이라 AI 모델 학습을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데이터와 계산 능력을 필요로 한다. 덕분에 AI 학습에 필수적인 GPU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큰 회사로 성장했다. 실리콘밸리 빅테크들은 지금까지 모델 학습에 투자한 수십조원을 다시 벌어들이기 위해 수백조~수천조원을 추가 투자해야 하는 ‘치킨게임’에 빠져버렸다.
AI 모델 학습과 사용(추론)에 필요한 데이터센터 운영을 위해선 기가와트(GW)급 전력도 필요하다. 오픈AI가 텍사스에 건설 중인 첫 ‘스타게이트’ 데이터센터 혼자 5GW 넘는 전력을 필요로 한다. 메타가 루이지애나에 기획 중인 ‘하이페리온’ 데이터센터 역시 5GW 전력이 필요하다. 원자력 발전소 5기 정도의 발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 모든 변화는 ‘시작’일 뿐이다. 레스토랑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애피타이저 정도만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알파고나 챗GPT 같은 기존 AI는 인간의 특정 능력 하나를 모방하고 대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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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기억하라…AGI 시대, 인간 갈등 무의미해진다”
여기에 반자율적 판단과 실행 능력까지 추가되는 순간 ‘에이전트 AI’가 가능해지고, 디지털 세상을 넘어 아날로그 현실에서도 행동이 가능한 ‘피지컬 AI’도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기술은 범용 AI(AGI)다. AGI는 기존 AI와 달리 잠재적으로 사회·경제·과학·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인간의 능력 대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AI를 의미한다.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은 이런 AGI가 ‘5년 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와 달리 10년에서 20년 이상 걸릴 거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중요한 건 ‘AGI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실리콘밸리 빅테크 파운더들은 AGI가 보편화된 미래 세상이 유토피아(이상적이고 완벽한 사회)가 될 거라고 믿는다. 현재 평균 2~3%인 GDP 성장률이 AGI 시대에는 매년 20~30%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들도 AGI가 현실이 되는 순간 가장 먼저 ‘생산성 역설성’이 해결될 거라고 말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조업 생산성은 꾸준히 올라갔지만, 비제조업 생산성은 1970년 이후 지난 50년 동안 더 늘지 않고 있다. 제조업은 투자하면 할수록 생산성을 올릴 수 있지만, 비제조업은 아무리 투자해도 생산성이 잘 오르지 않는다.
이는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제조업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인간은 느리고, 실수하고, 잠도 자야 한다. 단순히 돈만 투자한다고 인간의 지적 능력이 하루아침에 획기적으로 올라갈 리 없다. 반대로 AGI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고, 한번 배운 건 잊지 않고, 꾸준한 업데이트와 업스케일링이 가능하다. 반복성이 있는 단순 지적 노동은 에이전트 AI만으로도 충분히 대체될 수 있고, AGI가 현실이 되는 순간 일자리 30~40% 정도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AGI는 인류가 풀지 못한 과학적 난제도 풀 수 있다. 단백질 폴딩(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이 3차원 구조로 접히는 것) 문제를 AI 기술로 해결한 공로로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국제사회의 문제 대부분은 에너지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며 “AGI가 핵융합 문제를 푸는 순간 인류는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확보해 대부분의 사회·경제·정치 문제들이 자동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AGI가 암을 포함한 대부분 질병, 어쩌면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해줄 수도 있겠다.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을 피지컬 AI가 생산해 주고, 우주와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AGI가 풀어주고, 노벨상과 오스카와 에미상 모두 AGI가 수상하게 될 미래 세상….
빅테크 파운더들과 달리 그런 미래 세상을 디스토피아(불행하고 암울한 사회)로 보는 이들도 있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AI의 대부’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AI의 발전을 3단계로 본다. 우선 참과 거짓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아이들조차 비오3, 소라2, 클링으로 AI 영상을 만드는 오늘날, 그런 세상은 이미 현실이 돼버렸다. 두 번째 단계는 인간이 할 일이 없어지는 미래,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어쩌면 인간 그 자체가 없어지는 미래다.
힌턴 교수의 예측이 너무나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를 걱정하다 유토피아를 맞는 것이 유토피아를 꿈꾸다 디스토피아를 마주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더 현명한 방법 아닐까?
이제 막 2026년이 시작됐다. 지난 3년이 AI 시대의 서막이었다면, 올해는 ‘본게임’의 시대가 될 것이다. 많은 기업이 신규 채용을 꺼릴 것이고, 다음 선거 땐 AI로 생성된 가짜 영상이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다. AGI 시대가 돼가면 갈수록 노동의 가치는 떨어지고 자본의 가치만 올라간다면 사회 불평등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더는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다면, 마치 2000년 전 로마 공화정 때처럼 중산층이 몰락하고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 최첨단 기술과 중세시대 같은 초계급사회가 공존하는, 그러니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평행으로 존재하는, ‘기술 봉건주의’라는 역설적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막 시작될 AGI 시대. 우리는 과거와 현재는 알고 있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모두 함께 타게 될 AGI라는 배가 향하는 곳은 진정한 의미에서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곧 미지의 세상이다.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 우리가 도착할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인간과 AGI가 함께 경쟁하고 공존하게 될 이 ‘멋진 신세계’가 시작되는 순간, 그동안 너무나 크고 극복하기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던 인간들 간의 이념·종교·인종·민족·경제적 차이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어질 거란 사실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독일 막스플랑크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뇌를 모방한 인공신경망 학습을 하는 AI에도 관심이 많다.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