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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화산책] 팀플레이의 정석 보여준 ‘흑백요리사 2’

중앙일보

2025.12.3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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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평소 다양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를 즐겨 본다. 무한 경쟁, 승자독식 장르라는 한계가 있지만, 장르 불문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간절한 열정과 뜨거운 투지가 안이해진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서다. 종종 과몰입해 응원하던 출연자가 떨어지면 며칠 맘고생 하지만 그 또한 재미의 요소다.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약한 출연자들에게 눈이 간다. 고군분투하며 서바이벌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성장캐’ 약자들에게 마음을 뺏기는 쪽이다. 아마 많은 시청자가 그럴 것이다. 오디션은 말 그대로 무명의 참가자들이 기회의 공정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하고 스타덤에 오르는, 언더독 신화를 확인하는 장이니 말이다,

유명 셰프 모아 놓은 백수저팀
뜻밖에 진정성·겸손·희생 발휘
불화에 빠진 흑수저팀과 대비
성공 조직의 비결 다를 게 없어

넷플릭스 인기 예능 ‘흑백요리사’ 시즌2의 출연자들. [연합뉴스]
인기리에 공개 중인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 시즌2도 즐겨 보고 있다(이하 스포일러 있음). 유명 요리사 백수저 팀과 무명 요리사 흑수저 팀이 집단 경연을 벌이다가 최종 1인을 가리는 기본 구도에 약간의 변주를 가했다. 시즌1에서 탈락했지만 개성적인 캐릭터로 팬이 많은 최강록 셰프 등 재도전 멤버들을 ‘히든’ 카드로 깜짝 출연시키고, 3라운드 흑백 팀 미션에 ‘패배팀 전원탈락’이라는 벼랑 끝 장치를 둔 점 등이다.

백종원 리스크 넘어 넷플 1위
‘흑백요리사’는 2024년 시즌1 때 한국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 TV쇼 부문(비영어) 1위에 올랐는데 이번 시즌2도 공개 초반 1위에 올라 K예능의 경쟁력을 과시했다. 최근 여러 논란에 휘말린 심사위원 ‘백종원 리스크’가 있었으나 별 무리 없이 넘어가는 중이다. 시즌1보다 백씨의 비중을 줄였다.

총 13화 중 10화까지 공개된 현재까지 시즌2의 주인공은 의외로 언더독 흑수저 아닌 백수저들이다. 진정성과 몸에 밴 겸손한 태도가 시청자의 지지를 끌어냈다. 특히 하이라이트인 3라운드 흑백 팀플레이 미션 때는 최고 실력자들만 모였으니 서로 기량을 자랑하기에 바쁘고 대장 노릇 할 것이라는 예상 대신 팀플레이의 정석을 선보였다. 이들이 보여준 양보와 겸손, 희생과 조화에 시청자들이 크게 환호했다(재야의 고수 흑수저들이 대거 사랑받은 시즌1과 반대다).

100인분 미션이니 백수저 팀 리더는 일반 음식점에서 하루 300, 400인분 대량 조리를 해본 임성근 셰프가 맡았다. 계량 없이 눈대중으로만 조리하는 임 셰프 스타일은 언뜻 불안해 보였지만, 다른 멤버들은 믿고 따랐다. 임 셰프는 57년 경력의 ‘중식의 신’ 후덕죽 셰프에게 막내나 할 법한 참외 무치기를 자연스레 맡겼고, 후 셰프는 흔쾌히 이에 응했다.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도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는 고기 손질을 맡았다. 상호 신뢰와 양보에 기초한 부드러운 리더십·팔로어십이, 서로 충돌하고 책임을 돌리는 흑팀의 불화와 대비됐다. 결과는 승리였다. 물론 기본은 탄탄한 실력이다. 백수저 손종원 셰프는 최후의 순간 완성된 요리에 고명처럼 명란 한 점을 올렸는데 심사위원들로부터 신의 한 수였다는 평을 받았다. 역시 고수는 한 끗 차이 디테일에서 갈린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탈락했어도 인정받아 기뻐”
프로그램은 실력으로 무장한 고수의 세계, 프로페셔널리즘의 아름다움도 잘 보여줬다. 요즘은 전문가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지만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칼질, 재료 손질, 육수 내기 같은 기본기에서부터 오랜 수련을 거친 전문가 장인의 내공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사실 ‘흑백요리사’의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 내가 속한 조직의 축소판이다. 일 잘하고 열심인 구성원들의 팀워크, 제대로 된 평가와 피드백이 조직의 효율과 성공을 가른다. 요리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납득 가는 평가를 해주는 백종원·안성재 두 심사위원의 역할은 여전히 절묘했다. 고수를 알아보는 ‘찐고수’의 힘이랄까. 참가자들은 탈락하면서도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주는지 성패와 무관하게 감동적”이라든지 “심사위원에게 인정받은 기쁨이 무엇보다 크다”는 소감을 내놨다.

2인 팀미션에 이어 협력했던 파트너와 일대일 사생전을 벌여야 하는 4라운드에서도 인상적인 말들은 많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언제든 있다. 그걸 대처하라고 제가 있는 것이다 (…) 제 역할은 당황스러워하는 역할이 아니고 솔루션을 찾아야 하는 역할이다.” (돌발 상황을 맞은 손종원) “전부 임 셰프님 덕이다. 제가 잘한 건 파트너를 잘 골랐다는 점이다.”(임성근과 팀을 이뤄 1등 한 술빚는 윤주모) “떨어진 사람이 다 낙오자가 되는 게 아니다. 길이 있다.”(박효남의 탈락 소감) 팀의 최연장자로 일대일 경연에서 제자를 꺾은 후덕죽 셰프는 “내가 졌어야 했는데” 아쉬워하면서도 “즐거웠다”고 악수를 청했다. 스승 후 셰프의 추천으로 청와대 요리사가 돼 그 경력만 20년인 천상현 셰프는 “나는 영원한 사부님의 제자”라고 고개를 숙였다. 새해 아침, 올 한 해 우리 사회에도 이런 멋진 그림들이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양성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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