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낭봇’을 체내에 넣으면 풍성한 인공 모발이 나게 해주는 ‘모발 구독서비스’. 탈모인들 고민을 한번에 해결했을뿐만 아니라 머리 모양을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해준 혁신 덕분에 고가임에도 많은 구독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모낭봇이 통제불능 상태가 되면 이용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치명적 부작용이 드러났다. 서비스를 전면 중단해야 할 문제였지만 회사 측은 근본적 해결책 없이 5년간 무상구독권 제공을 제시하며 위기를 빠져나온다. “한번 맛 본 달콤함을 (구독자들이) 잊지 못할 것”이라는 내부 판단에 따른 것.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모발 구독서비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만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허구 세계 얘기지만, 최근 발생한 일련의 일들을 보면 평행우주에서 벌어진 현실 다큐멘터리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니, 어쩌면 현실은 웹툰보다 한술 더 뜬다. 이름·전화번호뿐만 아니라, 주소·주문 내역 등 민감한 회원정보 3370만개가 유출됐는데, 사과부터 미적거리더니 고작 1인당 5만원(사실상 1만원) 수준의 보상 방안을 제시한 쿠팡 얘기다.
쿠팡이 이렇게까지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웹툰 속 모발 구독서비스처럼 ‘탈팡’(쿠팡 탈퇴)은 어려울 것이라는 자신감 덕분이다. “내 정보가 공공재냐”며 분노해도, 당장 “내일 아침 학교 준비물이 없다”는 아이를 본 부모는 쿠팡 앱을 켤 수밖에 없다. 분노는 잠시 묻어두고, 당장의 안위를 위해 결제 버튼을 누른다. 시장의 자정 작용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다.
대체 불가능한 편리함은 소비자를 인질로 잡는다. 독점적 지위에 오른 플랫폼 기업에 3370만 개 정보 유출은 그저 확률적으로 발생 가능한 ‘리스크’이자, 사후 처리 비용이 들어가는 재무적 ‘변수’일 뿐이다. 많은 돈을 들여 보안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고가 터졌을 때 적당히 배상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냉철한 계산이다. 쿠팡 정도 되니 정치권부터 정부까지 나서서 제재를 가하려 하지만, 다른 플랫폼에 이런 일들이 또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결국 근본적 해법은 기업의 선의에 기대지 않아도 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응하지 않냐고 따지지 않아도 기업이 알아서 계산기를 두드리게 만들어야 한다. 수익을 좇는 기업의 생리상, 비용 절감의 유혹은 본능에 가깝다. 이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선의가 아니라 강력한 제도뿐이다. 보안사고 발생 시 감당해야 할 대가가 예방 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시장의 언어로 각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또다시 ‘평행우주 쿠팡’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