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교육에 몸담고 살았다. 교육은 평생에 걸친 문제이면서 인간을 깨닫고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체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내 주장과 신념도 그렇다.
군사정권 국민교육의 폐해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에 있던 때이다. ‘새 교육 운동’이 탄생되었다. 세 가지 결론을 얻었다. 미국 교육사절단과 우리 교육계의 합작품이었다. 그 첫째는 일제강점기 교육에서 벗어나는 변화이다. 부모를 위하고 따르는 인생관을 부모가 자녀들의 개성과 인격을 위한 노력으로 방향을 바꾸며, 스승을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 교육을 제자들의 행복과 인간 성장을 위해 전환시키는 변화였다. 두 번째는 살아가는 동안의 모든 교육평가는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벌 받는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를 버리고 ‘네가 알아서 해라, 잘했다, 너는 할 수 있다’라고 권고하고 칭찬해 주는 교육이었다. 욕하고 책망하는 평가를 버리고 ‘잘했다, 그렇게 하라’는 식이다. ‘정직하면 된다, 친구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서로 칭찬하라’라는 식의 생활 교육이다. 셋째로 정부는 교육자와 제자들을 위한 교육 정책 입안을 전문가에게 위임하라는 방향 전환이 새 교육 운동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위한 사랑이 있는 교육에는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런 정신적 여유가 있는 교육은 사라지고 다시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교육으로 바뀌었다. 대학에서까지 ‘국민교육’을 강조해 세계인으로 지향하는 윤리교육에 역행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수능시험 제도까지 감행했다. 그 계기는 단순했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교육계의 가장 큰 과제인 대학 입학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고 최상의 방법이라는 판단이었다. 비교육적이고, 사랑이나 인간적 가치를 배제한 통제력으로 전락시켰다. 생명력을 키워야 하는 교육에 있어서 창조적인 인간성을 배제한 방법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 왔다. 교육부 책임자가 바뀔수록 더 정밀해지는 방향과 방법으로 이끌어 갔다.
공정한 입시 위해 도입한 수능
인간미 사라진 통제 수단 전락
삶의 문제에 유일한 정답 없어
사랑이 있는 교육을 추구해야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올해의 입시 내용은 그 본질부터 문제가 되었다. 국어시험은 전문가들까지도 수용할 수 없는 오류를 발견하게 되고, 최대의 관심사인 영어 내용에서는 세계적 비판을 감수하게 되었다. 출제자 외에는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여론이다. 교육을 위해 노력한 수십 년의 계획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고 앞으로의 과제를 남겼을 뿐이다. 공교육보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국민에게 전가했다. 공교육의 부실과 국민교육의 정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자녀들과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평가와 방향은 실질적으로 사라져가는 실정이다. 사랑, 인격, 학생들의 장래와 희망을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교육계가 찾아가야 하는 큰 도로 한가운데에 입시를 위한 수능시험을 만들고 모든 학생은 이 수능시험의 언덕을 잘 넘어야 한다면서 불필요한 장애물을 설치한 결과가 되었다. 교육의 정도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피교육자인 젊은 인재들의 개성을 무시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결과가 되었다. 젊은 세대들의 행복과 희망을 입시제도의 제물로 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기계공학이나 자연 과학은 하나의 질문에서 하나의 정답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생활의 전체와 현실을 이끌어가는 사회과학은 하나의 물음에 하나의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여러 가지 해답 중에서 현실적 성과를 내기 위한 타당성 있는 답을 찾아야 한다. 변하고 발전하는 삶의 현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현실과의 타당성 중에서 몇 개의 대답을 얻게 되어 있다.
대학입시, 대학에 맡겨야 더 중요한 문제는 인문학 영역이다. 인간과 사상을 연구하는 인문학에서는 주어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답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제한 없는 해답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판단에는 삶에 관한 가치평가가 뒤따른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 해답은 하나일 수 없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창조성과 다양성이 버림받기 때문이다. 수능시험의 국어 문제는 인문학에 속한다. 영어 문제도 누구의 고정된 사상과 해답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문제를 대학에 가려는 젊은 세대들에게 강요하는 교육이 어디 있는가. 국내에서는 국어 문제가, 해외에서는 원어민 사용자들이 영어 문제를 문제 삼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입시제도 문제를 앞으로도 가지만 쳐가는 방법으로 해결 지으려 하면 안 된다. 어떤 노력도 없고 과업도 극복하지 못하는 정부 교육계의 현실과제가 되었다. 그런 반교육적이며 젊은 세대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약화하는 교육을 ‘사랑이 있는 교육’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 교육의 정도(正道)도 아니며 미래 세대를 위한 정부의 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의 수능시험 제도가 최선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대학입시는 교육 주체이면서 책임자인 대학 교육계에 맡겨야 한다. 인간교육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