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미술계에서 해외 거장들의 이름은 흔히 ‘경매가 수천억 원’이라는 자극적인 가십과 함께 소비되곤 한다. 장 미셸 바스키아(1960~88)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검은 피카소’ ‘요절한 천재 낙서 화가’ 등의 수식어는 그의 예술적 깊이보다는 비극적 생애와 천문학적 작품 가격을 포장하는 방편으로 쓰여 왔다. 하지만 최근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내면을 스스로 기록한 ‘노트’가 전시(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 1관, 1월 31일까지)를 통해 공개되면서, 바스키아를 읽는 우리의 눈과 귀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고 있다.
바스키아가 1980~87년 작성한 8권의 내밀한 노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14년. 일찌감치 바스키아를 알아본 컬렉터 래리 워시(Larry Warsh)가 소장한 이 노트가 대중에 공개되면서 이것이 단순히 아이디어를 적은 메모장이 아니라 거대한 캔버스에 옮겨지기 전, 그의 생각이 치열하게 충돌했던 ‘사유의 실험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노트 속에서 시인이자 언어학자였으며,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비평가였다. 그가 휘갈겨 쓴 단어들, 의도적으로 줄을 그어 지워버린 문장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탐욕스런 자본주의, 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생각을 담고 있다. 이 노트로 인해 우리는 바스키아가 단순히 본능적으로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린 ‘길거리 천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와 기호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핵심을 꿰뚫었던 전략가였음을, 그리고 가십이나 에피소드로 소비될 작가 이상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바스키아의 참모습을 만나면서 약 30년 전인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 경주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에서 열렸던 ‘워홀과 바스키아의 세계’ 전시가 새삼 떠오른다. 당시 전시는 단색조와 민중미술이란 우물에 여전히 갇혀 있던 청년 작가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전시는 바스키아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전, 뉴욕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1992년)보다도 1년 앞서 열렸다.
당시 한국의 미술계와 대중에게 바스키아의 ‘낙서 같은 그림’은 낯설고 당혹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국립미술관과 사립 미술관이 손을 잡고 동시대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소개했던 것은 한국 미술계가 세계적 흐름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 선제적으로 읽어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 바스키아의 노트를 보며 그의 작가적 성취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어쩌면 35년 전 우리가 그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뒤늦게 보고 듣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스키아는 흑인 화가로서 선구적 위치를 점하며, 거리의 문법을 제도권 미술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청년이다. 그는 미술의 권위에 저항했고, 대중문화와 신화, 역사를 한데 버무려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전형을 제시했다.
이제 우리는 소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의 노트를 읽어야 한다. 이번 전시에는 한 천재의 광기 어린 필치가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고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던 한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특히 노트에서 발견되는 바스키아의 시각적 핵심 기호인 영웅을 향한 존경과 찬미 그리고 권위와 존중의 왕관, 삶의 덧없음과 죽음, 인간의 본질을 상징하는 해골, 자기작품이 단순한 낙서가 아닌 독창적 예술이란 의미의 저작권 기호(ⓒ)는 그가 화가 이전에, 인간적 고뇌와 예술가로서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문법을 어떻게 구축하려 고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성실한 관객이라면 기호학적 해석이란 ‘정답’에서 벗어나, 노트 속 지워진 단어의 침묵, 선의 굵기와 색채의 파열음에서 들리는 소리, 화면 속 파편들에 눈이 가는 이유 등 “바스키아 작품의 무엇이 지금 나의 어디를 건드리나”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필요가 있다.
35년 전 과천과 경주에서 시작된 바스키아와의 인연이, 오늘 전시장의 노트와 맞닿아, 예술가로서 그의 참모습을 완성해 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제 더는 비싼 경매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인종과 계급, 존재에 대한 묵직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다시 바스키아를 읽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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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초대권을 드린다. 초대권은 전시 종료일인 1월 31일까지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