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일출 못 봐도 아쉽지 않았다

중앙일보

2026.01.01 07:13 2026.01.01 12:21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태백산은 1월에 가장 붐빈다. 새해를 맞아 소원을 빌고 새 마음을 다지는 사람이 많아서다. 운이 좋으면 정상에서 일출도 볼 수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25일 촬영했다. 일출은 못 봤지만 백두대간 마루금과 운무가 어우러진 모습이 근사했다.
태백산(太白山·1567m)은 겨울 산의 대명사다. 이름과 높이만 보면 소백산(小白山·1439m)보다 험할 것 같지만, 아니다. 들머리 고도(900m)가 높고 산세도 순한 편이다. 지난 연말 태백산을 올랐다. 2026년 새해를 앞두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 가뭄이 심하다. 혹여 눈이 없을까 걱정했었는데, 태백산은 역시 겨울 산이었다. 깊은 골짜기는 발목까지 잠길 만큼 눈이 쌓여 있었고, 산 정상에서 백두대간의 그림 같은 절경을 마주쳤다.

태백시장이 올라와 제사 올리는 산
태백산은 고조선 건국 신화에 나오는 한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터가 태백산이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이 백두산을 일컫는다는 해석도 있지만, 우리 선조는 1500년 전인 삼국 시대부터 태백산을 신령한 산으로 받들어 산신제를 지내왔다.

태백산 정상부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천제단’이 자리한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고조선 건국신화의 무대다. 지금도 개천절에 나라의 안녕을 비는 ‘천제’가 진행된다.
산을 신으로 모시는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개천절이 되면 천제단(1561m)에서 ‘천제(天祭)’가 열리는데, 태백시장도 참석한다. 태백시장을 하려면 태백산을 받드는 마음에 체력도 있어야 한다.

지난해 12월 25일. 태백산을 오르는 무속인을 숱하게 마주쳤다. 요즘 태백산에서 굿판을 벌이거나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무속인은 없다. 정부가 2016년 태백산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불법 시설을 철거하고 위험한 무속 행위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태백산이 국립공원이 된 지 10년이 됐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반려견과 함께 산을 오르다가 국립공원 직원에 저지당한 산행객을 목격했다. 반려견을 동반하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경고를 듣자 산행객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립공원에는 강아지 못 들어가요?”

정상부서 반겨주는 나무 4000그루
국립공원에 반려동물이 출입 금지라는 건 몰라도 겨울 태백산이 좋다는 건 다들 아는 모양이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탐방객 수의 40~50%가 겨울 석 달에 집중된다. 특히 1월이 가장 붐빈다. 새해에 천제단에 올라 소원을 빌거나 마음을 다잡으려는 사람이 많아서다.

오전 5시. 유일사 주차장에서 태백산국립공원 이승민 계장과 김찬식 반장을 만나 일출 산행에 나섰다. 해발 900m에 자리한 유일사 주차장을 출발해 장군봉 정상을 찍은 뒤 당골로 내려오는 루트가 태백산의 풍광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대표 코스다.

일출 산행을 계획한다면 랜턴을 꼭 챙겨야 한다.
출발 시각 기온은 영상 2도였고, 사방에는 눈 내린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20분 만에 겨울 산행 장비를 장착해야 했다.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아이젠을 등산화에 착용했고, 발목에 눈이 스미지 않도록 스패츠도 걸쳤다. 아이젠과 스패츠는 겨울 산행의 필수품이다.

비구니 사찰인 유일사를 지나니 경사가 가팔라졌다. 거위 털 재킷이 거추장스러워져 배낭에 구겨 넣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40분 만에 능선에 올라탔다.

칼바람이 얼굴을 후려치는 와중에 고고히 선 주목 한두 그루가 보였다. 진초록 잎 무성한 나무보다 언제 명을 다했는지 알 수 없는 고사목(枯死木)에 두 눈이 사로잡혔다.

정상부의 주목 군락지. 태백산에는 주목이 약 4000그루를 헤아린다.
태백산에는 주목 약 4000그루가 있다고 한다. 고사목까지 헤아린 수치다. 죽어도 산 것처럼 개체를 인정하는 나무는 주목이 유일한 듯싶다. 그래서 주목에는 죽어도 1000년을 산다는 표현이 따라다닌다. 주목은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차로 오르는 가장 높은 고개 ‘만항재’
오전 7시 30분. 장군봉(1567m)을 지나 천제단 앞에 서서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사이로 해가 비집고 나올 듯하더니 희부연 안개가 풍경을 지워버렸다. 기대했던 새빨간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쉽긴 했지만, 융단처럼 깔린 구름도 그런대로 멋졌다. 이승민 계장이 말했다.

“저희도 정상에서 일출은 잘 못 봅니다. 그래도 운무가 장관이고 상고대도 봤으니 운이 나쁜 건 아니네요.”

잠시 소원을 빌었다. 새해에 ‘대박’은 없어도 된다. 일상의 작은 행복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 맑은 날, 새벽부터 산을 올랐다고 매번 일출에 성공하지는 않는 것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당골. 태백산은 물이 많은 산이다.
당골 방향으로 하산했다. 당골은 옛날 계곡을 따라 신당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다. 망경대(망경사)를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하얗던 풍경이 초록 세상으로 바뀌었다. 이끼 낀 계곡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렸다. 천상에서 비로소 지상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자동차를 몰고 찾아갈 수 있는 만항재. 산책 삼아 눈길을 걷기 좋다.
태백산 겨울 산행이 부담스럽다면 가까운 만항재(1330m)를 권한다. 한국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가 만항재다. 만항재에 오르면 야생화 공원이 눈 천지다. 정선 방향으로 이어지는 운탄고도 구간은 평지나 다름없어서 산책하듯 걷기 좋다. 태백산 국립공원 최고봉인 함백산(1573m)도 만항재에서 가깝다. 왕복 2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

☞여행정보
신재민 기자
태백산 겨울 산행 코스는 유일사~천제단~당골 코스가 무난하다. 정상 왕복에 4~5시간 걸린다. 차를 가져갔다면 당골 주차장에서 유일사 주차장까지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 아니면 유일사로 원점 회귀하면 된다. 아이젠·스패츠 말고도 등산 스틱과 핫팩, 날씨에 따라 입고 벗기 편한 겨울 등산 의류를 잘 갖추길 권한다. 동절기(11~3월) 태백산 입산 시간은 오전 4시부터 오후 3시까지다.




최승표([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