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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사익 위해 나라 팔았으나 끝내 경계인으로 남아

중앙일보

2026.01.0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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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충성 바친 고려인 반역자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매국(賣國). 나라를 판다는 말이다. 사전에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이 말이 나온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진(秦)나라 왕이 소진(蘇秦)을 두고 “나라를 팔아먹고 변절을 거듭한 신하”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이 『사기』에 나온다. 소진은 전국시대 최강국 진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나라(초·연·제·한·위·조)가 협력해야 한다는 소위 합종책을 주창했고, 그래서 진왕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따라서 소진의 매국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였다고 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자기 나라를 판 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반역’이란 말을 더 많이 썼는데, 황제를 거역하는 행위를 ‘反逆’,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치고 타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叛逆’이라고 했다. 뒤의 ‘叛逆’이 매국과 같은 말이 되겠다. 고려도 긴 역사에서 반역자가 없을 수 없었다. 『고려사』는 ‘반역전(叛逆傳)’을 따로 두고 40여 명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고려인 부대 끌고 고국 쳤던 홍복원
인질 고려 왕족 홀대하다 처형돼

홍복원 아들 홍차구 용맹 떨쳤지만
충렬왕 외교 담판, 고려에서 쫓겨나

고려사 ‘반역전’에 나오는 40여 명
몽골 내 행적 불분명 쓸쓸한 삶 산 듯

앞장서 항복 권유한 홍대순
강원도 철원의 동주산성 터. 1254년(고종 41) 동주산성이 몽골군에 함락되었는데, 그때 홍복원이 참전했다. [사진 철원군]
고려시대의 반역자 가운데는 몽골과 전쟁 중에 항복한 사람이 많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살길이 막힌 상황에서 항복한 것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항복의 동기나 항복 이후의 행적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홍대순(洪大純)이란 사람이 있었다. 1218년 압록강 바로 남쪽 인주(평안북도 의주)의 군대 지휘관이었는데, 몽골군이 들어오자 싸우지 않고 나가서 맞이했다. 몽골과의 첫 접촉이고, 이때까지만 해도 몽골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 행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1231년부터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자 아들 홍복원(洪福源)을 데리고 재빨리 항복했다. 그리고는 몽골군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역할을 했다. 생존을 위한 항복으로 보기 어려운 태도였다.

1232년 겨울, 처인성(경기도 용인)에서 몽골군 지휘관 사르탁이 김윤후의 화살에 죽고 몽골군이 모두 철수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홍복원은 서경(평양)에서 1년 동안 버티고 있다가 조정의 토벌에 밀려 몽골로 도망쳤다. 몽골에서는 자원해서 건너왔거나 포로로 끌려온 고려 사람들을 심양(랴오닝성 선양)과 요양(랴오닝성 랴오양) 일대에 집단 거주시키고 홍복원에게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이라는 관직을 주어 관리하게 했다. 홍복원은 이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많을 때는 3000을 헤아렸는데, 이 군대를 끌고 고려 침략에 앞장섰다. 1235년 자주(평안남도 순천)·귀주(평안북도 구성), 1254년 동주(강원도 철원)·춘주(강원도 춘천)·충주, 1256년 해양(지금 광주) 등이 그가 출몰한 지역이었다. 거기서 그가 동족을 살상하며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을 침략한 몽골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蒙古襲来絵詞). [사진 일본 규슈대학 도서관 디지털아카이브]
반역의 대가로 홍복원은 원에서 출세했다. 쿠빌라이 칸을 직접 만나 갑옷과 안장 등을 하사받는 영광도 누렸고, 요양에 설치된 동경(東京)의 최고 관직인 총관까지 승진했다. 『고려사』와 『원사』 열전에 모두 이름을 올린 것은 홍복원이 유일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 반역자를 몽골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쓸모가 다하자 헌신짝처럼 버렸다. 전쟁 중 몽골에 인질로 파견된 고려 왕족 왕준(王綧)과의 불화가 발단이었다. 그의 최후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려사』 열전).

왕준이 처음 몽골에 갔을 때 홍복원의 집에 거처하며 신세를 졌다. 하지만 그의 눈에 평민 출신인 홍복원이 하찮게 보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심양·요양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 사람들에 대한 관리권을 홍복원에게서 빼앗으려고 여기저기 청탁했다. 홍복원이 이 사실을 알고는 “공이 제게 은혜를 입은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저를 모함하십니까? 이는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무는 격입니다”라며 따졌다. 곁에서 이 말을 듣던 왕준의 부인이(이 사람은 몽골의 황족이었다) 화를 내며 홍복원을 무릎 꿇게 하고는 물었다. “너는 네 나라에 있을 때 무얼 하던 사람이냐?” 홍복원이 “변방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우리 공은 무얼 하던 사람이냐?” 하고 물었다. “왕족이셨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우리 공이 주인이고 네가 개이거늘, 도리어 공을 개라고 하고 주인을 문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황제께서 우리 공이 왕족이라며 혼인시켜서 내가 공을 모시고 살고 있는데, 만약 공이 개라면 내가 개와 산다는 말이냐?”라며 곧바로 황제에게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제 쿠빌라이는 장사 수십 명으로 하여금 홍복원을 밟아 죽이게 했다. 나라를 팔아 출세한 사람답지 않은 초라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홍차구 중앙관직 못 얻어
홍복원의 아들 홍준기는 어려서부터 몽골군에 종군했고, 용맹스럽다는 소리를 들었다. 쿠빌라이 칸이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이름인 ‘차구(茶丘)’라고 불러 친근함을 보였고, 그 때문에 홍차구로 더 알려졌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었지만, 2년 만에 쿠빌라이에게 호소해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왕준에게 빼앗겼던 장관 자리도 되찾았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고려를 침략해서 몽골에 충성 바칠 기회는 없었다. 그사이에 강화가 맺어지고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다. 강화의 조건으로 고려에서는 전쟁 중 항복한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몽골로서는 돌아가면 죽을 게 뻔한 이 ‘충견’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 바람에 홍차구를 비롯한 반역자들이 몽골에 남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홍차구는 양국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로 활용했다.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진도와 제주도를 공격했고, 몽골이 일본을 침략할 때는 힌두와 함께 몽골군 최고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 무렵 홍차구는 고려 국왕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보면 온전한 몽골인으로 정착한 듯했지만, 여전히 몽골의 주류 사회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중앙 관직에는 임명되지 않았고, 몽골의 변방인 동경을 떠나지 못했다.

홍차구조차 그랬으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끝내 몽골인이 될 수도 없고, 고려로 돌아올 수도 없게 된 경계인의 삶이었다. 몽골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충성심을 증명해야 했는데, 몽골에 빌붙어 고려를 모함하거나 몽골의 고려 수탈에 앞장서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반역 행위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항저우의 악비묘(岳飛墓) 옆에 꿇어앉은 진회(秦檜) 부부 동상. 중국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을 매국적(賣國賊)이라고 했다. [사진 이익주]
이추(李樞)라는 사람이 있었다. 고려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찌감치 몽골로 도망해 들어갔다. 1271년부터 본격적으로 반역 행위를 시작해서 금칠(金漆)·청등(靑藤)·팔랑충(八郞虫)·비목(榧木)·노태목(奴台木) 같은 희귀한 물건이 고려에서 생산된다고 일러바쳤다. 이 말을 듣고 몽골에서는 그를 고려로 파견해 가져오도록 했고, 고려에서는 이런 물건을 찾아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또 고려에 큰 목재가 있다고 하고 고려에 와서는 배 10척 분량의 목재를 실어 갔다. 이밖에도 조윤통이란 자는 산삼이 난다고 하고, 임유간은 진주가 난다고 하고, 홍종로는 금이 난다고 하고는 고려에 와서 몽골의 약탈을 돕고, 겸해서 사사로운 이익을 챙겼다.

일본의 국권 침탈 때 ‘매국노’ 단어 등장
매국노의 대명사였던 이완용.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표현은 20세기 초 일본의 국권 침탈 때 등장했다. [중앙포토]
반역자의 존재는 고려 외교에 큰 짐이 되었다. 1278년 충렬왕은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만나 담판을 벌였다.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 군대와 다루가치를 철수시키고 아울러 홍차구를 몽골로 불러들일 것을 요구했고, 대신 앞으로 있을 몽골의 일본 침략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반역의 무리를 고려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이 몽골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름을 남긴 사람이 없는 거로 보아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신채호의 논설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대한협회회보, 1908년 6월 25일)에 ‘매국노’ ‘망국적’이라는 표현이 나온 부분.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조선시대에는 매국의 의미로 반역이란 말이 더 많이 쓰였다. 그러다 1900년대 초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매국노(賣國奴)라는 말이 등장했다.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는 노예처럼 남에게 종속된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는 비하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국권을 빼앗긴 적 있는 우리에게는 매국노에게 치를 떨며 살아온 역사가 있다. 2026년 새해에는 부디 이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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