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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의 시선] 세 개의 ‘사업보국’

중앙일보

2026.01.01 07:26 2026.01.0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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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경제산업부국장
조금 고리타분한 얘기로 새해를 시작해 보자. 사업보국(事業報國), 10여 년 전 기업 총수 신년사에나 등장했던 표현이다. ‘사업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 여기서 보(報)는 ‘갚다’ ‘보답하다’는 의미다. 국가·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에 기업이 일자리와 세금, 수출로 공헌하겠다는 인식이다.

사업보국(報國)의 국내 원조는 이병철(1910~1987) 삼성 창업주가 아닐까. 그는 자서전 『호암자전』에 이렇게 남겼다. “독립 국가 한국의 기업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나라 부강의 기초가 되는 민족자본의 형성이야말로 최우선 과제다. 사업 입지를 굳혔던 것을 제1의 각성이라고 한다면, 해방과 함께 결심한 사업보국 신념은 제2의 각성인 셈이다…때로는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고용·세금·수출 공헌 ‘보(報)국’
관세협상 땐 ‘지킬 보(保)’ 존재감
정부·기업 ‘도울 보(輔)’ 관계 돼야

일자리 하나 더 만들고, 해외에서 1달러라도 벌어오는 게 생존이고 애국이었다. 이렇게 호암의 사업보국엔 유교적·도덕적 결연함이 묻어 있다.

그 사업보국의 개념이 조금 달라지고 있다. 지난 한해 가장 짜릿했던 비즈니스 장면으로 ‘인공지능(AI) 깐부’를 맺은 젠슨 황과 이재용, 정의선의 쓰리 샷이 꼽힌다. 사진만 찍은 게 아니다. 젠슨 황은 한국에 AI 칩 26만 장을 깜짝 선물로 내놨다. 관세 협상 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사로잡았던 ‘마스가(MASGA·미 조선업 부활 패키지) 카드’도 인상적이었다.

젠슨 황이 깐부라서 ‘전략 자원’을 덥석 넘기고, 트럼프는 마스가를 시그니처 프로젝트(대표 사업)로 밀고 나갈까. 그럴 리가. 한국이 보유한 ‘넘사벽’ 반도체 칩과 조선 경쟁력 덕분이다. 무역 전쟁과 지정학 리스크 속에서 말 그대로 존재감 뿜뿜이다. 이쯤 되면 나라를 지킨 보국(保國)이다.

‘갚을 보’ 사업보국이 이병철식 기업관이라면, ‘지킬 보’ 사업보국은 아산 정주영(1915~2001) 스타일과 닮았다. 아산의 기업보국은 지난함에서 나온다. 세월을 사야 한다. K조선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가스터빈이 그렇다. 지난해 말 두산에너빌리티가 대형 가스터빈을 ‘종주국’ 미국에 수출했을 때 업계가 화들짝 놀랐다. 제너럴일렉트릭·지멘스 등 전 세계 서너 개 업체만 생산하던 제품이었는데 신출내기 두산과 손을 잡아서다.

여기엔 두산그룹 4세 박지원 회장의 ‘20년 설득’이 숨어있다. 그는 20년 내내 봉급쟁이 사장이 바뀔 때마다 가스터빈 국산화를 주문했고, 어김없이 ‘지금 역량으로 안 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마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설파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센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안정적 전력 조달이 숙제가 됐다. 덩달아 가스터빈 수요가 급증하면서 두산은 ‘귀하신 몸’이 됐다.

이번엔 사업보국(輔國)이다. 이때 보는 ‘돕는다’는 의미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독립운동가 김기오(1900~1955) 선생 얘기를 듣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된 그가 마흔여덟에 대한교과서를 창업할 때 슬로건이 ‘출판보국(輔國)’이었다. 가장 먼저 펴낸 게 『누에치기』 『거름』 『농작물 두루풀이』 같은 실업 교과서다. 도서당 발행 부수가 400부 미만, 돈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실용 교육은 갓 태어난 나라가 못하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며 소신을 밀어붙였다(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도울 보’ 사업보국은 국가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부족한 영역을 민간이 채우는 방식이다. 그게 해방 후 실용 교육이었다면, 지금은 AI나 플랫폼 영역일 것이다. 경제 안보와도 직결되니 보국(保國)과 보국(輔國)은 동전의 양면 같다.

돈만 잘 벌면 문제없다는 시대는 지났다. 독점 해도, 갑질 해도 나라에 기여하니까 괜찮다는 마인드는 이제 소비자가, 투자자가 용서하지 않는다. 지속가능성이 경영 화두가 되고, ESG(환경·사회적 가치·지배구조) 열풍이 불면서 ‘세 개의 보국’은 필수 구비세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여당은 어떤가. 여전히 대기업 하면 하청업체 쥐어짜고, 서로 짬짜미나 하는 집단이라고 재단한다. 기업인은 벤츠 타고 다니며 로비하는 부류로 여긴다. 그러니 노란봉투법에 이어 제3차 상법 개정을 논의 중이다. 탄력근로제 확대, 업종별 차등 적용 같은 융통성을 열어두지 않고 주 52시간제 족쇄에 가둔다. 세계는 거꾸로다. 보조금 퍼주고, 규제 풀면서 기업을 모시고 있다. 이렇게 급박한데도 일단 기업 때려잡기, 이거야말로 고리타분함을 넘어선다. 지금은 그 이상의 위기다.





이상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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