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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도 돼요?" 힐링성지 된 점집…전날 밤 '오픈런'까지 한다

중앙일보

2026.01.01 12:00 2026.01.0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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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낮 12시쯤 서울 강남구의 한 타로카드 가게 입구에 크게 붙어 있는 ‘2026 사주타로 신년운세’ 문구를 지나니 짙은 초록색 커튼이 눈에 띄었다. 바로 앞 테이블엔 점주와 20대 여성 손님이 마주 앉아 사주를 보고 있었다. 새해 연애운을 묻는 손님에게 점주는 “지금 급하다고 빨리 만나서 결혼하려고 하면 안 된다. 28세쯤 운이 바뀌니 공부를 계속하고, (상대의) 내적인 면을 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1일, 강남구의 한 점집에서 시민이 타로점을 보고 있다. 류효림 기자

이날 서울 곳곳의 유명 점집들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용산구의 한 유명 점짐엔 새해 운세를 보기 위해 전날 밤에 와서 미리 ‘오픈런’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챗GPT 등 인공지능(AI)으로 운세를 보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점집 역시 일부 고령층이나 ‘찾는 사람만 찾던’ 과거와 달리 일종의 상담소 역할을 하며 젊은 세대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미신을 맹신하기 보단 ‘힐링’이나 용기가 필요한 젊은 층의 새해맞이 장소로 이용되는 모습이다.

마포구에서 타로 가게를 운영하는 한 점주는 “연말에는 손님이 많이 늘어 새벽 2시까지도 일한다”고 했다. 강서구에서 철학원을 운영하는 도모(73)씨도 “얼마 전엔 오후 11시까지 영업을 하고 사무실에서 잤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용산구의 한 유명 점집엔 다음 날 아침에 운세를 보기 위해 오후 10시부터 대기하는 손님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10시 용산구 이태원의 한 점집 앞에 점을 보기 위해 '오픈런'에 나선 시민의 모습. 김정재 기자

점집을 찾은 이들의 고민은 다양했다. ‘용하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강남구 논현동 점집에 운세를 보러 왔다는 남양주시 주민 김모(52)씨는 “아들이 면접에서 자꾸 떨어져서 걱정돼서 왔는데, 사장님이 기다려보라면서 긍정적인 말을 했다”며 “새해 소망은 아들의 취업”이라며 웃었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모(37)씨는 “부모님이 반대해서 점을 보러 다니고 있는데, 새해엔 결혼해서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논현동의 철학원을 찾은 50대 장모씨는 “지난해 집을 팔고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다행히 올해 음력 10월에는 집이 팔린다고 한다”며 기뻐했다.

과거 점집의 주된 이용자이자 충성 고객이었던 중장년층 중에도 챗GPT 등 AI로 운세를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이 많아 이용자가 크게 줄어든 점집도 있다. 매년 사주를 보러 다니다 지난해부터 안 다니기 시작했다는 50대 여성 A씨는 “사주는 어차피 통계니까 챗GPT가 더 잘 맞출 것 같아 요새는 다니지 않는다”며 “주변에 같이 보러 다니던 사람들도 요샌 다 AI를 배워서 그걸로 본다”고 했다.

새해 첫날, 강남구의 한 철학원을 찾은 라모(33)씨, 이모(31)씨는 ″내년에 결혼해 날짜 받으러 왔다″며 ″각자 사주와 궁합을 봤는데, 회사가 좀 안정을 찾아 결혼 준비에 힘을 쏟고 싶다″고 했다. 이규림 기자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입소문을 탄 일부 점집의 경우 그 빈자리를 오히려 10~20대의 젊은 층이 채우는 곳도 있었다. 타로카드 점을 보러 강남의 한 가게를 찾은 최모(20)씨는 “원래 사주에 관심이 많아 챗GPT로 종종 보곤 했는데, 전체적인 신년 운세가 궁금해 실제로 가게를 찾아오게 됐다”고 했다. 또 올해 갓 성인이 됐다는 조모(19)씨와 김모(19)씨는 “올해에는 연애를 해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며 “주변 친구들도 인터넷이나 AI로 보는 대신, 직접 타로를 보러다니는 애들이 종종 있다. 고민은 대부분 우리랑 비슷하다. 꼭 믿어서 다닌다기보단 재미삼아 보러 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웃었다. 한 타로카드 가게 주인은 “최근 20대, 심지어는 10대 손님들이 많아지는 게 체감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광진구의 한 점집에서 손님이 사주를 보고 있다. 태권도 실업팀에서 운동하다가 올해 은퇴했다는 김모(29)씨는 ″사주 초년기엔 운동이 있었고, 이젠 공부를 할 때라고 들어 체육단체 행정직을 알아볼까 한다″고 했다. 류효림 기자

큰일을 앞두거나 심각한 고민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는 일종의 상담소 역할을 하며 명맥을 이어 가는 곳들도 많았다. 다수의 점집 주인들과 손님들이 “힘든 일이 있어서, 절실한 마음으로 보러 온다는 건 옛말이고 요새는 재미 삼아 오거나 힐링이 된다는 사람도 많다”고 입을 모았다. 강서구에서 철학원을 운영하는 한 점주는 “새해에는 꿈 있는 사람들이 주로 오고, 올해처럼 선거가 있는 해는 그와 관련해 상담을 오는 사람도 많다”며 “무슨 큰 위기에 빠지거나 힘든 사람만 온다는 건 오해다. 요즘은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고 전했다.



김창용.이규림.류효림.한찬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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