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은퇴하면 그만이지만, 이미 들어간 수백억원은 누가 책임지나.” 주연 배우의 은퇴 선언과 함께 드라마 ‘두 번째 시그널’(tvN 드라마 ‘시그널’의 후속작)의 공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는 소식을 접하며, 대중은 배우의 도덕성을 논했고 팬들은 무산 위기에 놓인 작품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전직 PD이자 현직 변호사인 필자는 다른 곳에서 더 큰 비명소리를 들었다. 바로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제작사와 투자자들의 비명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연예계 이슈가 아니다. 한국 콘텐트 산업이 안고 있는 리스크 관리 시스템의 공백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다.
법이 만든 ‘알 수 없는 과거’
사태의 본질은 단순하다. 제작사는 수백억원을 투자하면서도 주연 배우의 중대한 평판 리스크를 사전에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소년법에 있다. 소년법은 보호처분을 형사 전과로 보지 않으며, 그 사실이 장래 신상에 불이익을 주지 않도록 설계돼 있다. 또한 미성년 시절의 행위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 낙인이 되지 않도록, 관련 기록의 공개를 엄격히 제한한다. 이는 소년범의 재사회화라는 소년법의 핵심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법은 미성숙한 소년이 행한 과거의 과오를 ‘잊어주겠다’고 약속한다. 따라서 해당 배우는 계약 당시 자신의 소년 시절 보호처분 전력에 대해 법적으로 고지할 의무가 없었다. 현행 소년법·기록 비공개 원칙상, 통상적인 상업계약 과정에서 제작사가 이를 확인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오히려 이를 집요하게 문제 삼는 행위는 소년법의 취지나 인권 침해 논란과 충돌할 수 있다. 법은 개인의 인권을 철저히 보호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산업은 눈을 가린 채 수백억원이 오가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책임질 사람은 없고, 손해만 남았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제작사가 배우나 소속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현행 법제와 계약 관행을 전제로 보면, 손해배상 인정 가능성은 높지 않다.
손해배상의 전제는 계약 위반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 법적으로 봉인된 미성년 시절의 행위를 현재의 품위 유지 의무 위반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배우가 적극적으로 허위 사실을 고지한 것도 아니다. 법이 허용한 권리에 따라 침묵했을 뿐이다. 다만, 개별 계약에서 별도의 진술·보증 조항을 둔 경우는 예외적으로 다른 결론이 나올 여지도 있다.
결국 제작사는 법적으로 잘못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배우의 과거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된다. 과거 기록을 파헤친 것이 정당한 알 권리인지, 과도한 사적 제재인지에 대한 논쟁과는 별개로, 현실의 비용은 제작사와 투자자에게 전가된다. 이것이 현재 K-콘텐트 산업이 마주한 냉정한 현실이다.
할리우드는 ‘도덕’ 대신 ‘시스템’을 택했다
그렇다면 해외는 다를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지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일정한 중대 범죄는 봉인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지만, 역시 미성년자의 범죄 기록을 원칙적으로 봉인한다. 제도적 취지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법이 해결하지 못한 공백을 시장 시스템으로 메웠다.
대표적인 장치가 '완성보증보험(Completion Bond)'이다. 할리우드의 대형 프로젝트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보험 가입이 사실상 필수다. 보험사는 제작비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받는 대신, 주요 배우와 스태프의 리스크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실무상 평판, 일정 관리, 건강 문제 등 법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요소들까지 포함된다. 사후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보험금으로 배우를 교체해 재촬영을 하거나 기술적 수정 등을 통해 작품의 완성을 도모한다. 최소한 작품이 통째로 폐기되는 상황은 막는 구조다. 제작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보험 시스템이 분산해 떠안는 셈이다.
계약서 역시 다르다. 미국에서는 이른바 '도덕성 조항(Morality Clause)'을 통해 과거 고지 여부와 무관하게, 특정 사실이 공개되어 작품에 중대한 타격을 줄 경우 손해를 분담하도록 ‘결과 책임’을 명시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아무런 대비가 없는 상태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장치다.
이제는 감정이 아니라 시스템을 이야기할 때다. 한국 드라마 시장은 이제 단일 작품 제작비가 수백억원을 넘나드는 거대 산업이 됐다. 그러나 리스크 관리 방식은 여전히 개인의 판단과 경험, 인맥에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산업의 규모와 위험이 더는 맞지 않는다.
몇 가지 논의는 시작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한적 고지 의무에 대한 검토다. 대중 공개가 아니라, 일정 금액 이상의 고액 상업적 계약에 한해 중대한 범죄 전력을 계약 상대방에게만 제한적으로 공유하는 방안이다. 이는 엄격한 비밀유지와 목적 제한을 전제로 한 최소한의 계약 판단 정보 제공이어야 한다. 소년법 취지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산업 보호를 모색할 시점이다. 둘째, 한국형 완성보증보험의 정착이다. 제작 리스크를 제작사 대표 개인의 책임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다. 이미 일부 영화·영상 분야에서 시도된 완성보증 제도를 OTT·지상파 대형 드라마까지 확장하고, 금융권과 정부, 공공 재보험 제도가 함께 참여하는 산업적 안전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계약서의 진화다.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추상적인 문구 대신, 방영 불가, 플랫폼 철회, 광고 중단 등 구체적인 손해 유형과 책임 분담 구조를 명시한 표준화된 리스크 관리 특약이 요구된다. 이른바 도덕성 조항(morality clause)을 한국 실정에 맞게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를 이유로 소년법의 취지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취지가 제작사와 투자자에게 아무런 방어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수백 명의 스태프와 투자자, 그리고 오랜 시간 작품을 기다려온 시청자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감정적 비난을 넘어, 차가운 시스템의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소개
이용해 변호사는 SBS 등에서 20년간 PD 및 제작사 대표로 활동하며 콘텐츠 산업의 최전선을 지켰다. 이후 변호사가 되었으며, 법무법인 화우 파트너변호사를 거쳐 현재 YH&CO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현장 경험과 법리를 융합한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로서 업계의 굵직한 분쟁들을 해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