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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 공부로 방향 틀게한 '열가지 질문' [왕겅우 회고록 (34)]

중앙일보

2026.01.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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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 내용을 읽고 민족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중국근대사의 굴곡을 더 잘 이해하게는 되었다. 쑨원은 다음 여섯 강연에서 “민권”, 즉 민주주의를 논했다.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 발전사에 관한 그의 주장과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그의 설명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두 가지 논점은 마음에 새겨졌다. 하나는 자유와 평등의 의미가 중국에서는 다르기 때문에 서양 관념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중국인에게 자유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유가 너무 많아서 조직과 훈련이 더 잘 된 세력의 공격을 받을 때 방어를 위한 단결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너무 단순하고 피상적인 이해였는데, 주어진 과제를 넘어 더 깊이 살펴볼 흥은 나지 않았다.

세 번째 주제 “민생”에 관한 네 강연은 쑨원이 끝내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불완전한 형태였다. 그가 이 원리를 사회주의나 마르크시즘에서 구분한 방법, 특히 기존의 어느 이념도 중국의 농업경제와 관련된 문제들의 해결에 적합지 않다고 본 이유가 흥미로웠다. 토지의 사용권과 소유권, 그리고 중국 농민의 곤경을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분명했다. 담당 교수는 이 부분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면서 쑨원이 진심으로 빈민을 위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고 중국을 파괴할 내전에 빈민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했다고 강조하는 기색이었다. 학생들은 내전의 양측 모두 똑같이 배고픈 농민을 제물로 삼는다며 이 주장에 반발했다. 수도에 있는 가장 혜택받는 대학의 젊은 학생들도 집권 정부의 입장을 모두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불만의 원천은 참고서로 추천된 두 권의 책으로 기억된다. 무료로 배부되었고, 나는 그 책들이 강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둘 다 받아 보았다. 하나는 첸리푸(陳立夫)의 〈삶의 원리(生之原理)〉였고 또 하나는 장제스의 〈중국의 운명(中國之命運)〉이었다. 첸리푸는 장제스의 심복으로 전임 문교부장관이었다. 두 책 다 전쟁 중에, 첸리푸가 장관이고 장제스가 1943-44년에 잠깐 중앙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나왔다. 아 책들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담당 교수는 시험 범위에 넣지 않겠다고 물러섰다.

〈삶의 원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제창하는 유물론 철학과 대학의 과학자들 사이에 만연한 과학주의 풍조에 대항하는 책이었다. 첸리푸 자신이 자연과학 공부를 한 사람이고 앙리 베르그송을 포함한 서양의 최신 생물학과 심리학 연구성과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반공 선전물로 여기고 읽으려 하지 않았다. 내게 창조적 진화라는 관념은 흥미로웠으나 책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담당 교수는 이 책들이 공산당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담은 것이라는 말만 하고 삼민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설명이 없었다. 장제스의 책은 민족중흥의 선언문으로서, 소련 및 미국과 정부의 관계가 복잡한 이유, 그리고 전쟁 후 공산당과의 싸움을 위해 미국의 도움을 청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삼민주의 강의가 끝나고 어떻게 합격했는지 모르게 시험에 합격했을 때, 쑨원 자신의 글을 읽으며 그 글에 노골적 불신감을 보이는 친구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책을 읽음으로 해서 나는 어떻게 해서인지 인문학적 관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정치철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걸어나왔다. 그 과목에는 물론 아무런 학문적 엄격성도 없었고 내 마음을 지식의 다른 영역에 맞춰줄 연마의 기회가 될 활기찬 토론이나 명확한 득실의 검토도 없었다. 그러나 그 교재들을 읽음으로써 후에 마주치게 될 사회과학 원리들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된 것이다.

이포에서 자라나는 동안 들어보기는 했어도 깊이 생각한 일이 없던 몇 가지 개념을 삼민주의 강의를 통해 새로 의식하게 되었다. 영국인도 일본인도 우리가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내가 고국에 관해 아는 것은 부모님에게 듣거나 아버지가 권해주신 고전에서 읽은 것뿐이었다. 강의에서 만나 내 마음에 자리 잡고 말라야까지 따라온 단어들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반갑지 않기까지 한 것들이었지만, 계속 되살아나며 그 후의 여러 상황 속에서 내게 엄연한 실체가 되었다. 훗날의 내 글에서 거듭거듭 해석과 의문의 대상이 되는 아래의 관념들이 난징에서 쑨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혁명: “혁명(revolution)”이란 전통적 “거밍(革命)”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민족주의: 중국인에게 민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권리: 개인의 권리보다 다른 권리들이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유: 중국인이 원래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평등: 구호로서 평등과 현실 속의 평등은 어떤 것인가?
공화국: 중국의 정치구조에서 공화국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당: 하나의 정당이 어떻게 중국의 국가가 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 많은 중국인에게 자본주의가 매력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주의: 다른 중국인들에게 사회주의가 매력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시즘과 공산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단어들의 중요성은 내가 중국에서 더 멀리 더 오래 있을수록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말라야로 돌아오자 이 단어들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고, 문학 공부에 자신감을 잃었을 때 내가 역사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데도 한몫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1949년 말라야는 독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중국공산당의 성공에 고무받은 게릴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양한 민족주의가 새로이 규정되는 가운데 민주적 사회주의가 마르크스-레닌 국제주의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위에 열거한 단어들은 꼭 쑨원이 사용했던 의미나 중화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의미대로가 아니더라도 널리 이해되었다.

쑨원의 책 〈삼민주의〉가 실효성을 잃고 있는 동안에도 제국과 식민지의 시대를 끝내려는 노력 속에 깨어난 아시아인의 의식은 바로 이 단어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말라야에서는 이 단어들의 연구와 이해의 필요가 절실해지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 갈 때 공부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 식자층의 일상적 대화에 쓰이면서 거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난징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외부인으로 공부하던 시절보다 중국을 떠난 후에 그 단어들이 내게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중국 대학의 진학은 고국에 남아 고국에 봉사하는 길로 낙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 나는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초년의 학교교육으로부터 해방되었고, 1947년 이포를 떠날 때 가지고 있던 설익은 희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나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첫걸음이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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