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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만난 전쟁의 비극…‘벙커 트릴로지’

중앙일보

2026.01.03 22:55 2026.01.04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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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덧댄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면 지하 벙커가 등장한다. ‘ㄷ(디귿)’자로 배치된 100여 석 규모의 객석과 무대는 말 그대로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다. 공연 전 맨 앞줄에 앉은 관객에게는 “다리를 안쪽으로 넣어 달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있다. 다리를 뻗으면 배우와 충돌할 수 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맥베스' 에피소드 공연 장면. 셰익스피어 명작 비극 속 '맥베스'와 지휘관이 되자 숨겨진 본심을 드러내는 장교 '마크'의 욕망과 광기가 교차된다. 사진 아이엠컬처

지난달 17일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그린 작품이다. ‘트릴로지(trilogy·3부작)’라는 제목처럼 세편의 연작으로 구성됐다. 각각 75분씩 모두 하루에 공연한다. 순서는 매일 다르다. 배우 4명이 솔저1·2·3·4 배역을 맡아 3편에 모두 출연한다. 3개 에피소드를 하루에 몰아보는 관객도 드물지 않다.

‘아가멤논’은 영국 여성 ‘크리스틴’과 독일군 저격수 ‘알베르트’ 부부의 얘기를 다룬다. 벙커는 피 튀기는 전장과 부부가 애정을 나누는 공간을 오간다. ‘크리스틴’의 오빠가 영국군으로 참전하면서 참혹한 운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가멤논’은 신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친다. 신의 화는 달랬지만 아내의 증오를 사며 비극을 맞는다. ‘알베르트’는 이 비극을 따라간다.

‘맥베스’는 극중극 형태를 띤다. 영국군 후방 본부 참호 안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전 ‘맥베스’가 공연된다. 종전이 목전에 왔음을 자축한다는 명목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왕을 시해한 뒤 잠이 들 수 없는 공연 속 ‘맥베스’의 고뇌와 전쟁 중 지휘관이 되자 숨은 욕망을 드러내며 광기에 사로잡히는 장교 ‘마크’의 모습이 물 흐르듯 교차한다.

‘모르가나’는 전쟁을 험난한 등산쯤으로 여겨 참전한 동네 친구들이 실제 전쟁 속 참화를 겪으며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 친구들은 서로를 아서왕, 그리고 원탁의 기사인 랜슬롯과 가웨인으로 부른다. ‘모르가나’는 ‘아서 왕의 전설’ 속 악한 마녀다. 군인이 된 젊은이들의 공포가 마녀의 환영과 맞물려 극대화한다.

이 세 편의 에피소드는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쟁을 공통분모로 포화 속 인간성이 말살하는 과정은 동일하다. 군번줄·촛불·베개 등이 주요 장치로 쓰인다는 점도 같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모르가나' 에피소드 공연 모습. 장난처럼 전쟁에 참여한 동네 친구들이 실제 참화를 겪으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그린다. 사진 아이엠컬처
좁은 지하 벙커 속 빽빽이 앉은 관객들은 관람자가 아닌 전쟁의 목격자가 된다. 자리에 따라 코앞에서 배우들이 몸싸움하고, 상처를 입은 군인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숨을 헐떡이기도 한다. ‘맥베스’ 에피소드에서는 관객들이 병사가 돼 군번줄을 목에 메고 상관에게 거수경례를 한다.

영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 제스로 컴튼이 만든 원작은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듬해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 연극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작으로 소개됐다. 이후 2016년 국내 초연, 2018년 재연했다.

앞선 국내 두 시즌에 참여했던 김태형 연출가와 지이선 작가가 이번 시즌에도 연출과 극작을 맡았다. 모두 12명의 배우가 참여한다. 초연부터 참여한 이석준·정연·신성민이 이번 시즌에도 출연한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에서 얼굴을 알린 문태유,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에 출연한 정운선은 TV 연기와는 또 다른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며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벙커 트릴로지’는 오는 3월 2일까지 이어진다. 2월 1일까지 오픈된 티켓은 전석 매진 상태다. 한 관객은 예매 사이트에 “티켓 구하기 어려운 것 빼면 모든 게 좋았던 작품”이라는 관람평을 남겼다.



하남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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